열린마당

[사제단상] 3개월 앞둔 세계성체대회 민족공감대 형성하는 계기되길/조군호 신부

조군호 · 서울 수유1동 본당주임
입력일 2020-08-26 수정일 2020-08-26 발행일 1989-07-23 제 1665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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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며, 역사적인 삶을 사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개인적인 개체로서도 그렇거니와 연대적 사회공동체로서도 그러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0세기의 단위가 바뀌는 2천 년대를 10년 앞에 둔 이 시점의 세상과 사회는, 언제나 역사는 그러한 것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유달리 격동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저 큰 나라라고만 생각했던 중국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개혁주의로 서서히 변모하는 과정 중 급기야 인민들이 피를 흘리며 민주화의 빵을 요구하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이르고 있다. 이에 미국과 서유럽국가들은 여러 형태로 중국에 온건한 평정과 순리적인 질서회복을 위한 시각에서 외교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알 수 없는 괴물의 대명사 같던 크레물린 궁전의 동태 역시 외적으로는 온순한 실용주의자의 모습으로 변모해가고 있다는 인상이다. 지난달에는 군비를 감축하겠다는 결단적 정책이 전해지더니 이데올로기의 고착적 분계선을 타파하는 듯 서서히 사회복지를 위한, 빵을 위해 온유한 미소와 정책적 시도를 병행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 세계평화의 부재를 증거하는 대표적 화약고의 하나는 분명 중동지역이다. 그중에서도 회교권의 제정일치 체제를 확립하고 극우적인 강경노선을 줄달음쳐오며 국수주의적 영웅이라는 찬사와 광신적이며 폐쇄적인 독재라는 엇갈린 평가를 한 몸에 받아온 호메니옹의 죽음, 그것은 중동지역 뿐 아니라 세계권 내의 또 다른 내일을 가능케 하는 변수로 등장했다.

이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터로 시선을 돌려보면 작은 한반도이지만 우리에겐 어쩔 수 없이 가장 소중한 삶의 현장이기에 역사라는 보편성을 넘어 구체적 생존감이 팽팽히 조여옴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거한 지역들 못지않게 복잡한 문제들에 얽혀 매듭을 풀지 못하는 숨 가쁜 상황에 우리 사회가 처해있음을 그 누가 모르랴! 그러기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오가면서 서로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서글픈 애정으로 어느 때 보다도 일체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역설적이며 어쩌면 낭만적일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분명 우리『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계속 잘못 끼워져 나간다』는 형식논리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중간부터라도 단추를 제구멍에 찾아 끼우면 바로 될 것이고 그러면 잘못 끼워진 단추도 풀어 바로 끼울 수 있는 깨달음과 여력이 주어진다는 역설적인 논리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은 또한 그런데 있지 않을까 하고 소박한 희망을 나누어 가지고 싶다. 더욱 슬기로 왔던 우리 조상님들은『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훌륭한 삶의 지혜를 속담으로 물려주시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 교회내로 시선을 옮겨본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일찍이 육당 최남선 선생이 예고한대로 순교정신의 위대함을 밑거름으로 급성장을 해왔다. 조선교구 설정 1백50주년 기념행사 2백주년 기념행사 등으로 근년에 신자 수는 배가 되었고, 어쩌면 인기도 절정에 올랐다. 그리고 요즈음은 세계성체대회를 삼 개월 남짓 앞두고 그 준비가 한창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는 순탄한 항해이며 더욱 바람직한 항로 설정이 되어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조금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성체대회 그 자체를 반대할 사람은 교회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 그 시기 문제는 차치하고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위한 보다 바람직한 성체대회를 위해 우려되는 사항들을 간략히 헤아려본다. 첫째는 대회행사를 외적으로만 치우치다보면 자칫 가톨릭교회가 물량적인 자기성장 도모와 자기과시에 치중한다는 외부의 비판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는 행사과정을 위한 준비, 전달, 시행과정에서 하향적인 방법만이 우선시 된다면 작금의 일반적인 우리 사회분위기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예기치 못했던 갈등과 혼란이 교회 안에도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일방적인 명령이나 지시일변도로 행사를 도모해갈 때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민도가 성장했듯이 보다 책임감 있고 자율성 있는 신앙인들로서 교회가 자녀들을 품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본인 자신이 수용해야만 값있는 것이 된다는 것은 순리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셋째는 성체대회를 너무 교회내 행사로만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사회, 우리 민족전체를 위한 의의있는 행사가 되도록 보다 배려가 있어야할 것이다.

잘못된 견해일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우리 교회 안에는 이 땅에서 삶을 지키고 있는 민중과 교회에 속한 신자들을 부지불식간에 양분하는 경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 역시 위기상황에 처한 이 사회에서 똑같이 몸살과 피곤을 온몸에 느끼고 있는 민중임을 망각하고 그저 교회 안에서 고요하게 합장하고 있는 교우들로만 생각하고 또 그런 신자들만을 상대역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다.

결론적으로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있을뿐더러 교회는 선의를 가진 이들의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성체대회는 나름대로 뜻있게 진행되고 마무리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보다 내실있는 성체대회를 위해 심도 있는 작업이 수반되었으면 한다. 물론 「사목」잡지가 금년부터 월간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1년간 대주제를 「성체」로 설정하여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특집으로 편집해나가고 있음을 다행하게 생각하며 아울러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역시 「사목」지는 아직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수준이기에 욕심을 부린다면 보다 대중성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는 방안, 또 보다 한국적 현실에 토착화할 수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영성적 작업을 요청해 보고 싶다.

『받아먹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마르꼬14, 22).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마태11, 28). 이상관계를 한국적 현실에서 사회와 민중에게 설득력 있는 제시를 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빵은 다양하다. 남북통일이라는 한민족의 빵, 민주화라는 빵, 임금인상이라는 빵, 여러 사회집단들의 자익을 위한 나름 나름의 빵의 요구들.

과연 성체성사의 빵은 무엇인가? 자칫 예수를 자신의 소신, 주장, 이익을 위한 전유물로 극대화 할 때 여기서도 극우, 극좌 등 여러 형태의 이설이 무성할 수 있다. 때문에 성체대회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올바른 성서 신학적 토대 위에서, 또 삶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성체가, 예수가 다양한 모든 인간 실존에 선물이 될 수 있기 위한 인간학적 접근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 안에서, 예수 안에서 복합적인 요구들이 상충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올바른 사회변혁과 발전을 위한 사회학적인 접근도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그러하듯 이 시대, 이 민족을 위해서도 성체가 생명의 빵이라는 성체성사에 관한 설득력 있는 진술과 언표를 보다 영성적으로, 동시에 보다 대중적으로 펴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고쳐 말해 성체대회가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접목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부언하고 싶은 것은, 기고의 동기는 본당신설에서 성전준공과 축성식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며 진정 복음정신대로 하느님께 충성하고 있는 것이냐ㆍ아니면 제도적 교회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자의식의 괴리와 갈등을 다년간 체험해온 팔삭동이 같은 일선사목자로서, 내일의 한국교회와 이민족을 포함하는 광의의 하느님 백성을 위한 나름대로의 발전적 제언이라 생각하여 두서없이 졸필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조군호 · 서울 수유1동 본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