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 김대건 신부 발자취를 따라

김인옥 · 허남 기자
입력일 2020-08-14 수정일 2020-08-14 발행일 1989-07-09 제 166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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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성인의 삶 향기 가득
4대걸쳐 순교한「신앙 가문」전통이어
사제 서품 후「골배마실」서 첫 미사봉헌
성인유해 안장된 미리내 성지엔「103위 성인 기념성전」건립 한창
본보는 7월 5일 한국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신부의 축일을 지내면서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국내성지의 지상순례를 기획했다. 김 신부의 출생지로부터 성장지ㆍ순교지와 유학, 묘지까지를 순례하며 엮은 이 순례기는 신자들로 하여금 한국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에 대한 신심과 시도생활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계시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일생을 조명하고 그분과 관련된 성지의 안내를 겸한 이번 기획은 여름 휴가철을 맞는 신자들이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있는 순례코스로도 적합할 것으로 기대된다.

출생지

충남 당진군 「솔뫼」

성 김대건신부의 탄생지 「솔뫼」.

소나무 숲이 아름다와「솔뫼(松山)」라는 이곳은 천안에서 1시간, 온양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듯한「솔뫼」를 향해 가자면 모내기를 끝낸 논에 푸른 파도와 같이 일렁이는 벼포기들과 길가에 늘어 핀 이름 모를 들꽃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민족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전국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같은 풍경의 시골마을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은 솔뫼를 찾는 이로 하여금 자기의 고향을 찾는 푸근함과 편안함을 안겨준다.

「한덕」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1㎞ 떨어진 곳에 자리한 솔뫼 성지 초입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가 보존되고 있다. 비록 2백 년 전 옛 모습은 간 곳 없어도 그때 우물터엔 훗날 축조한 개량식 우물이 자리 잡고 있고 집터가 있던 뒤편엔 마을에서 드물게 남은 소나무 숲이 있다. 3백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20여 그루의 소나무는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의 꿈과 신앙을 말해주는 듯하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천주교 신자 김제준과 고우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양반가문이었던 그의 집안은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천주교로 말미암아 전락한 대표적인 가문이기도 하다.

증조부인 김진후는 1791년부터 박해를 받다가 1814년 을해박해 때 순교했고, 종조부 김학현, 부친 김제준도이어 순교했으며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순교함으로써 32년간 4대가 순교하는 신앙의 가문으로 기록됐다. 그로 인해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우기도 한다.

김 신부가 태어나 박해를 피해 일가가 골배마실로 이주하기 전 7살까지 뛰놀며 신앙과 삶의 지표를 싹틔운 곳 「솔뫼」는 김 신부가 시복된 1925년 출생지로서의 의미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후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해 46년 기념비가 설립됐으며 77년 현재 솔뫼성지에 있는 동상이 세워졌다. 또 대전교구의 주도아래 「솔뫼 피정의 집」이 83년 세워져 성지로서, 기도와 명상지로서,「솔뫼」가 완성되고 있다.

대전교구는 순례자들의 순례헌금을 한푼 두푼 모아 김대건 신부 생가 복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기도 하다.

1백50여 년 전 박해의 여파가 아직도 남은 듯 솔뫼 주변엔 신자가 거의 없다는 말을 뒤로 하면서 박해를 피해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떠나야 했던 김신부 일가의 아픔을 헤아리며 그들의 여정을 따라 골배마실로 향해갔다.

성장지

용인군 「골배마실」

유명인사가 있으면 그 사람의 성장기나 성장지가 궁금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더욱이 신앙인에게는 성인들이 자라났던 곳에 들러보고 싶은 것이 공통된 마음일 게다.

용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여 분간 진천쪽으로 가다보면 「양지」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과거에는 「골배마실」이라고 불렸던 마을로 김대건 신부가 성장했던 곳이자, 한국인 사제에 의해 첫 미사가 봉헌된 축복된 땅이다.

용인에서 이곳까지는 길옆에 펼쳐진 시골 전형의 논밭이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가 하면, 김 신부가 성장기의 꿈을 키웠던 집터까지는 우거진 산림이 푸르른 자연의 싱그러움과 함께 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큰길에서 성지까지 걸어 들어가는 약3㎞의 길을 걸으면서 김 신부의 성장모습과 첫 미사 봉헌시의 열정담긴 눈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동시에 그 꿈을 완전히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로 군문효수 당하는 그분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섯 살의 어린나이로 부모님과 함께 정해년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유학을 떠나기 전 10여 년간을 이곳에서 온갖 꿈을 키웠을 김 신부의 여러 모습들.

사제가 되고자 외국유학길에 들어서 어머니가 계시는 이 땅을 그렇게도 그리워했을 김 신부의 모습ㆍ궁핍한 생활과 군졸들의 눈을 피해 가슴 졸이며 숨어 살지만 언젠가 이 땅에 하느님의 씨앗이 백배로 열매 맺을 것을 믿고 산 선조들의 믿음의 여러 모습들 등등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특히 김 신부의 순교소식을 접한 어머니 고(高)우술라의 피맺힌 절규가 산허리를 돌아 귓가에 들리는 듯 할 때에는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현재 이 「골배마실」성지는 골프장내에 있으며, 김 신부의 영세터에 우사가 지어져 있는 등 앞으로 많은 개발이 요구되고 있다.

성(聖)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 후 이 일대를 돌아 다니셨던 만큼 순례자들도 이곳을 순례하고자 할 때 이 근처에 같이 자리하고 있는 은이, 익산 나바위, 미리내 성지를 함께 순례하면 좋다.

유학

마카오ㆍ마닐라ㆍ중국

골배마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대건은 드디어 최양업등과 함께 사제수업을 위한 유학의 길에 오른다.

15세 어린나이에 발탁돼 마카오, 마닐라ㆍ중국 상해 등지에서 사제수업을 받으면서 그곳에 뿌린 그의 땀과 눈물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값진 보물이다.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는 국내보다 유학생활을 했던 이곳에 더욱 진하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1836년 12월3일 최양업등과 함께 6개월이라는 긴 여행 끝에 마카오에 도착 했으나 유학생활 중1837년에 일어난 마카오민란으로 마닐라로 피신, 마닐라의 「콜롬보이」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편 고국의 박해소식을 들은 김대건은 여러 차례 갖은 방법으로 입국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 후 중국 「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은 김 부제는 1845년1월 드디어 입국, 순교자료수집ㆍ신학생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845년 상해「김가항」에서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곧 고국으로 입국하여 1년여 동안 사목활동을 펼치던 중 새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려하다가 그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1846년 6월 결국 군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순교지

서울 용산구 「새남터」

서품 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사목활동을 폈던 김 신부는 중국(청나라)에서 대기 중이던 동료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의 영입을 위해 준비하던 중 「국금을 어기고 통외(通外)하는 사람」으로 지목돼 체포됐다.

40여 차례 심문을 거쳐 김 신부는「군문효수형」의 선고를 받게 된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마침내 한양성 10리 밖의 새남터에서 희광이가 내리치는 칼날 아래 참사되고 효수됐다.

김 신부의 짧았으나 굵은 생을 마감하게 한「새남터」는 현재의 서울 용산구 서부 이촌동 부근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일명「노들」「사남기(沙南基)」라 불리던 곳으로 김 신부를 비롯한 주교와 신부들이 처형된 피의 땅이기도 하다.

현재는 철도공작창으로 쓰여지고 있고 재개발지구로 묶인 서민 아파트단지가 주위에 있는 새남터는 전철1호선 용산역 또는 4호선 신용산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이며 버스편을 이용하면 용산 시외버스터미널 앞 혹은 원효로 4가에서 하차해 10분 정도 걸어서 닿을 수 있다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은모래가 반짝였을 옛 새남터의 모습대신 그곳엔 철도소음이 끊이지 않고 시정사람들의 소박하고 빠듯한 삶들이 모여 있다.

주위의 이러한 경관과는 이질적으로 우뚝 선「순교성지새남터 기념성당」만이 신앙선조들이 흘린 성혈의 영광을 드러내주고 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은 성직자만 12명에 이르며 이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천상에 이르는 문을 열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950년 「새남터」순교지로 지정했고 67년부터 이곳에서 주민구재사업과 교육사업을 폈던 한국순교복자수도회가 83년 기념대성당 신축을 시작해 87년 9월 전통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성당을 완공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봉헌되는 새남터본당은 특별히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한국순교성인 103위에 대한 신심으로 커가는 곳으로 2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하는「103위 현양기도모임」이 88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묘지

경기 안성군 「미리내」

안성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약 30여분 걸리는 곳에 미산(美山)이라는 산이 있다.

여름이면 나무들이 유난히 더 푸르고 가을이 되면 오색 단풍이 수를 놓고, 겨울에는 한번 눈이 덮이면 잘 녹지 않는 설경이 장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 버스로 1시간대 내에는 금강저수지ㆍ이동저수지등 유명낚시터와 민속촌ㆍ자연농원 등 유명 관광명소가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산과 산이 포옹하고 있는 마을이 최근 들어 부쩍 유명해지고 있는데, 이런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이산이 단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이곳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성인 103위 대표이신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유택(幽宅)을 비롯 수많은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김 신부의 시신이 여기에 안장되기 전부터 이곳은 신유년(1801) 을해년(1815) 정해년(1827)의 교난을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방면의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공동체를 이루면서 신앙을 지켜온 곳으로 유난히 신앙의 숨소리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성지이다.

그래서인지 일명 「미리내 성지」라고 불리우는 이 성지에서 배출된 성직자ㆍ수도자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며, 수많은 은총과 개인적이 기적체험을 한 이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지금 이곳 미리내 성지에는 성모성심수도회가 순교성인들의 삶을 본받으면서 하루 평균1백여 명의 순례객과 피정객들을 지도해 주고 있으며, 103위 성인을 기념키 위한 대성전이 9월말 완공예정으로 건축되고 있다.

특히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김대건 신부가 사목을 하기 위해 다녔던 산길이자 김 신부의 시신이 옮겨졌던 산길을 4시간에 걸쳐 걸어볼 수가 있는데, 그 감회와 느낌이란 이 산길을 직접 넘어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이다.

우거진 숲 사이로 신망애(信望愛) 삼덕(三德)고개로 명명된 고개 3개를 넘다보면 불과1백50여 년 전에 이 길을 통해 복음을 전교코자 동분서주하셨던 김 신부의 모습과 김 신부의 시신을 모시고 7일간 밤길을 걸어와 이 길을 거쳐 미리내로 들어왔던 이민식 옹의 모습 등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 같아 신앙의 새로움이 절로 더해진다.

■교통편

(1)서울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앞에 위치한 뉴코아백화점 대형주차장에서 목ㆍ토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ㆍ오후 6시에 성모성심수도회의 버스가 출발한다. 또한 목요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오후 8시에 출발한다. 차편은 무료.

(2) 안성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약30여분이 소요된다. 시내버스는 오전 9시15분, 11시10분, 오후 3시10분, 5시30분, 6시10분, 8시30분, 10시에 있다. 택시를 이용하면 약15여분이 소요되며 5천 원이 든다.

■편리시설

(1)숙박시설: 철야기도를 할 수 있는 방이 마련돼 있으며, 또한 텐트를 칠 수 있는 야영장도 마련돼 있다.

(2)식사: 성지 내 관리식당에서 한끼 당 1천5백 원에 제공하고 있다.

(3)피정지도: 철야기도를 원하는 이들에게 저녁 11시30분부터 새벽 4시10분까지 수도회에서 지도를 하며, 언제든지 고백성사를 볼 수 있다.

김인옥 · 허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