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63) 보편구제설에 대한 단상 / 윌리엄 그림 신부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입력일 2020-08-11 수정일 2020-08-11 발행일 2020-08-16 제 3207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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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인물 중 간과됐던 이들이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중 하나는 사도행전 20장 9절에 나오는 에우티코스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길게 설교하는 동안 잠에 들은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아마도 전례가 진행되는 동안 잠에 든 사람 중 최초가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제자 중에는 이렇게 졸음을 유발하는 설교자들이 많았다.

복음서 안에서 필자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인물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그의 정체를 처음으로 발설한 이다. 이 인물은 항상 성스러울 수만은 없는 첫 선교사였을 텐데, 사실 그는 마귀였다. 마르코 복음서 1장 21~2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카파르나움의 한 회당에 가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가 가르치는 동안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복음 안에서 처음으로 누군가 예수가 진짜 누구인지 인지하고 공개적으로 이 사실이 선포된 부분이다. 이 마귀는 부주의하게 불쑥 주님의 정체를 폭로한 일로 어떤 어려움에 빠졌을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르코 복음서를 보면 이 마귀에게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동료가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복음 선포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또 한 사람의 이방인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바로 십자가형 처형장에 있던 백인대장이었다. 이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말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마르코 사도는 복음은 생각지 못했던 사람, 심지어 원수의 목소리로도 선포될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마귀가 무심코 벌인 선교 활동에 대한 보답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잡고 있기 바라고 기도해왔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어떤 이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지만, 어떤 이들은 선의로 그 일을 합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필리 1,15-18)

특정 누군가를 향해서 지옥에 빠질 것이라고 저주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 타인을 저주한다. 필자가 어릴 적에는, 금요일에 먹는 핫도그 하나로도 영원한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 더 좋았을 때도 있었다.

이러한 ‘자칭 판사’들을 보면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기 보다는 고소해하는 것 같다. 분별없이 타인을 저주하는 이들을 보면 이들은 “판단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심지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천국에서 지옥에 빠진 이들이 겪는 고통을 보는 것을 ‘위시리스트’의 하나로 남기기도 했다. 만일 지옥을 볼 수 있는 관람석에 있다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 혹시나 내가 겪을 지도 모르는 고통을 보며 기뻐할 수 있을까?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은? 이런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일 수 있을까?

연필을 새로 깎고 공책을 펴 신약성경의 구절 중에서 사도직의 목적이 지옥 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찾아보자. 아마도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연필을 새로 깎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복음서와 복음은 신의 복수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다. 이 사랑은 세상의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도 용서한다. 심지어 하느님을 죽이는 일까지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이런 사랑에 그저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저지르는 죄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 필요할까? 신학자들은 사도시대 이후 적어도 교부시대부터 이 질문에 대해 심사숙고 해 왔다.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335~395)은 오리게네스와 아마도 누나인 마크리나 성녀의 영향을 받아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마귀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 즉 그리스도의 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부르는 지옥은 처벌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정화를 위한 곳이 될 수 있다. 이 정화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영원한 곳에서 시간이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결국 정죄된 사람들은 한 순간도 이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그리스어로 보편구제설(apocatastasis)이라고 부르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지향했던 것으로의 복귀를 뜻한다. 필자 혹은 그 누구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하느님의 지향을 영원히 좌절시킬 수 있을까?

나중에 오리게네스의 보편구제설은 교회로부터 거부됐지만, 이것이 보편구제설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정교회, 동방교회, 성공회, 루터교에서도 성인으로 또 교부로 공경 받고 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와 그 마귀가 영원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허락해주길 기대한다. 또 에우티코스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말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