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7-14 수정일 2020-07-14 발행일 2020-07-19 제 320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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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한국교회 첫 수녀회로 활동

2018년 수도회 한국설립 130주년을 맞아 서울관구 회원들이 DMZ 평화의 길 순례를 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공

창설 당시 루이 쇼베 신부와 수도 공동체 회원들에게 내리신 성령의 고유 카리스마는 그들 삶의 방식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특별히 초기 공동체가 창설자들의 사망, 프랑스 혁명 등 여러 위기 안에서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보여준 파스카 삶은 수녀회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이 됐다.

수녀회 창립 192년만인 1888년 7월 22일, 4명의 선교 수녀들이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이는 그에 앞서 1년 전인 1887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블랑 주교가 한국교회 안에 수녀들의 봉사가 절실히 필요함을 인식해 수녀회 총장에게 파견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조선대목구는 1784년부터 100여 년 동안 혹독한 박해의 피가 마르지 않은 순교의 땅이었다. 블랑 주교는 첫 선교 수녀들에게 가톨릭 보육원 운영을 맡겼다.

수녀들이 입국한 지 일주일 후 순교자 후손인 다섯 명의 지원자가 입회해 수도 생활이 시작됐다. 1890년에는 수련장 엘리사벳 수녀가 파견됨으로써 정식으로 수련원도 개시됐다. 이렇게 수녀회는 조선대목구 사목 현장에서 교회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사도직을 폭넓게 수용하며 한국교회 첫 수녀회로서의 초석을 놓았다.

1915년에는 대구대목구 초대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요청으로 3명의 수녀가 대구 수녀원 초대 수녀로 파견됐다. 1916년에는 마리도나시엔 수녀가 대구 수녀원 1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1925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련원 인가를 받아 수련원을 개원했다.

일제의 탄압과 제1·2차 세계대전 등 격동의 세월을 한민족과 함께 겪어낸 수녀회는 한편 많은 지원자의 입회로 인적 자원이 풍부해졌으며 1948년 정식 관구로 승격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수녀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와 으제니 수련장 수녀가 죽음의 행진에 동원된다. 이중 베아트릭스 수녀는 중강진에서 총살됐고, 황해도 매화동본당서 활동하던 김 마리안나 수녀와 김 안젤라 수녀가 인민군에 의해 순교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회원들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피란 학교를 운영하는 등 적극적인 사도직을 펼쳤다.

전쟁 후 수녀회는 사도직 활동의 재정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1960년 첫 한국인 관구장을 배출하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회원이 420여 명에 이르자 발전적인 관구 분리가 결정돼 1967년 서울과 대구 양 관구로 나뉘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계속되면서 수녀회는 시대가 요청하는 사도직 개발에 주력하게 됐다. 그에 따라 본당 중심 사도직에서 차츰 사회사업 및 특수 사도직과 해외선교 사도직으로 보폭을 넓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올해 한국진출 132주년을 맞이한 수녀회는 내적 쇄신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수녀회의 고유 카리스마를 확인하며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도정에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