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 칼럼] (61) 인종차별, 창조를 거스르는 죄 / 윌리엄 그림 신부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입력일 2020-07-07 수정일 2020-07-07 발행일 2020-07-12 제 320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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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뉴욕시 근교에 살았다. 우리 가족은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유럽에서 이주했을 때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는데, 한 차례 거주민들의 인종과 민족이 바뀌었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가족은 낡은 아파트에서 벗어나 인근에 새로 개발된 공공주택으로 이주했다. 이사하기 며칠 전, 누군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로 같은 단지에 사는 한 히스패닉계 가족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은 히스패닉이 대다수였다.

서로 왕래가 있던 가족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우리가 떠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며, 아이들에게 우리 단지에서 집에서 영어를 쓰는 마지막 가족을 보게 해 주고 싶어 찾아온 것이었다. 부모님은 그들을 집에 들였고, 이들이 집을 떠났을 때, 우리는 “‘브롱크스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 된 느낌이었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보다 10여 년 전, 지역 거주민의 인종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했다. 내가 다섯 살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글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혼자서 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컸던 때였다. 나와 친구들이 한 놀이터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동네 형들이 우리를 막아 세웠다. 우리 마을은 유대가 긴밀한 곳이었고, 나도 그들을 알고 그들도 나를 알았다.

“이 표지판 보여? 이 표지판은 ‘두 인종이 함께 놀 수 없다’고 쓰여 있어. 빌리! 넌 들어갈 수 있지만, 네 친구들은 안 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형들은 컸고, 나는 완전 햇병아리였다. 형들의 부모들은 나의 부모들과 함께 자랐다. 이들은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표지판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알파벳을 읽을 줄 몰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읽을 줄 알게 됐을 때 확인해 보니, 이 표지판은 경찰 신고함 표지였다.

일생동안 나는 겁에 질려서, 생각이 모자라서, 이기적이어서, 편의를 위해서, 무관심해서, 혹은 그냥 어리석어서 부끄러운 짓을 참 많이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 나는 성인이 된 나보다 더 훌륭한 아이였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난 내 친구들과 같이 있을래.”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믿음은 창세기에 있는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가 자신들의 연구 결과와 대조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에 의해 흔들리지는 않는다.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전체는 생물학이 아니라 신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살던 5세기까지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성경에 있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서도 이를 수정하거나 대체하게 되는 새로운 지식을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우리에게는 내가 한 근본주의 개신교 교회에서 봤던 노아의 방주에 타 있는 한 마리의 스테고사우루스 공룡 벽화와 같은 것은 절대 없다.(그건 그렇고 두 마리가 타고 있어야했던 건 아닌가? 그래서 공룡이 멸종된 것인가?)

창조론이 주는 신학적인 메시지는 모든 인간을 포함한 이 모든 세계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는 여러 인종이 각각 다른 방법으로 창조됐다고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하와의 아들과 딸이다. 옥스퍼드대학교의 C.S. 루이스 교수가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에서 동물 주인공들을 불렀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DNA는 인간이 인류라는 하나의 종임을 확인해주며, 우리의 신앙은 우리 모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은 외모나 언어, 국적, 종교, 성 정체성, 나이, 육체적 혹은 정신적 상태, 교육의 차이 등으로 학대와 억압, 살인을 정당화하는 그 모든 것에 반대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창세기에 실린 진실, 하느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는 우리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과 단체가 짓는 심각한 죄이며,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한 경찰관이 아프리카계 시민을 죽인 일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시위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과 배척을 반대한다. 시위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성령의 활동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의 정의에 더욱 더 충실하도록 우리를 북돋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톨릭교회의 지도부는 어디에 있을까? 늘 그렇듯이 주교와 사목자들의 성명은 대부분 온건하고 추상적이다. “인종차별은 좋지 않지만, 시위는 평화롭게 하라” 정도다. 그간 교회와 사회에서 하느님의 실제 모상(인간)을 향해 이뤄진 공격에 대한 교회의 사회정의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던 미국의 한 대주교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석상이나 동상을 파괴한 행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언제쯤 주교 혹은 교회의 지도부가 하느님의 모상을 공격하는 죄에 대해 먼저 잘못을 고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게 될까? 언제쯤 이들이 추상성을 넘어 인종차별이라는 죄와의 싸움에 들어서게 될까? 언제쯤 그들이 악에 맞서 “난 내 친구들과 같이 있을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까?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