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수원교구 내 김대건 성인의 자취를 따라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07-07 수정일 2020-07-07 발행일 2020-07-12 제 320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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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사목·순교까지… 곳곳에 성인의 삶 어려 있어

미리내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 경당과 순교자의 모후 성모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미리내 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번지, 시궁산과 쌍령산 중심부 골짜기에 자리한 곳 미리내 성지.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우리말이다. 성지에 미리내 명칭이 붙은 까닭은 박해시대 교우촌이었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살던 천주교 신자 집들의 호롱 불빛이 밤하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빛나고, 그 모습이 은하수와 같다고 해서 지어졌다.

그처럼 한국교회 초기에 미리내는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며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이 찾아와 미리내 인근 산골짜기에 옮겨 살며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827년 여섯 살 김대건 성인은 할아버지 김택현,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충남 당진 솔뫼에서 박해를 피해 한덕골로 들어왔다. 미리내 고개 너머 인접한 골짜기 교우촌이었다.

성인의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던 이 장소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무효수형으로 순교한 이후에 다시 이어진다. 국사범으로 사형되면 통상 사흘 뒤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갔으나 성인은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가 지켰다.

이민식(빈첸시오, 1829~1921)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시신을 거뒀다. 그리고 10월 26일 몇몇 신자들과 함께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일주일 동안 150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안장했다. 이로써 미리내는 특별히 순교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됐다.

그때부터 7년 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가 선종하자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주교 유언을 따라 이민식은 그를 김대건 신부 묘소 옆자리에 안장했다.

또 1864년 5월 17일 성인의 모친 고우르술라가 숨을 거두자 성인 묘소 옆에 모셨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 모두를 잃고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어려운 삶을 이어갔었다. 아들 김대건 성인 곁에 눕게 해 생전에 함께 있지 못했던 모자(母子)간의 한을 위로하는 의미였다.

92세에 세상을 뜬 이민식은 그 자신도 성인 묘역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로 설립됐다가 1896년 갓등이(현 왕림)본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됐다. 성지 우측에는 1906년 건립된 미리내 성요셉성당과 구한말 일제 강점기 때 신자 자녀에게 천주교 교리와 초등교육을 했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이 남아있다.

성인의 시신은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면서 무덤이 발굴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옮겨졌으며 하악골은 미리내로, 치아는 절두산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됐다. 이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있던 유해 중 정강이뼈는 1983년 교황청에 조사차 가져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미리내 성지에 모셔졌다.

성지 내 성당 위에는 16위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으며 그곳에는 또한 이윤일 요한 성인 묘소가 있다.

■ 단내성가정성지

박해시대 이래 교우촌이자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바오로, 1804~1866)과 그의 재종손 정양묵(베드로, 1820~1866) 고향이자 유해가 묻힌 이곳은 한편 김대건 성인의 사목활동지로 기억되는 성지다.

교우촌 중에서도 단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특히 이천 지역에서는 처음 신앙이 뿌리내린 장소이기도 하다.

단내성가정성지에 있는 김대건 성인상.

사제서품 후 성인의 사목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다. 1845년 11월과 12월 사이 서울과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이것이 그의 사목 활동 전부라 할 수 있다. 단내는 성인이 방문하던 교우촌 중 한 곳이다. 정은 순교자는 이 시기에 그로부터 성사를 받기도 했다.

정은 순교자 가문에 전해진 얘기에 따르면, 당시 김대건 신부는 항상 밤에 신자들을 찾아 나섰다. 미사 짐도 없이 단내에서 10리가 채 못 되는 앞마을 동산리 지역에 와서 고해성사를 주고 단내로 넘어와 정은 바오로와 가족을 만났다고 한다. 성인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와서 인기척을 하면 신자들은 이웃이 알게 될까 봐 쉬쉬하며 맞았다. 신자들의 준비는 간단했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모셔 걸었다. 성인은 방문 후 신자들의 전송을 만류했다. ‘나 자신보다도 교우들에 대한 외인의 이목 때문이니 부디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으시오’라는 말로 아쉬움을 달랬다.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며 사목했던 성인은 이후 1846년 4월 13일 은이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 개척 임무를 맡고 서울로 떠났다.

성지에는 그때 성인이 걸었던 길이 진입로로 조성돼 있으며 대성당과 소성당에는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