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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발로 이 임금들의 목을 밟아라." / 김형태

김형태(요한),변호사
입력일 2020-06-23 수정일 2020-06-24 발행일 2020-06-28 제 320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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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기브온 위에, 달아, 아얄론 골짜기 위에 그대로 서 있어라. 그러자 백성들이 원수들에게 복수할 때까지 해가 그대로 서 있고 달이 멈추어 있었다.”(여호 10,12)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 여호수와는 가나안 땅에서 평화로이 잘 살고 있던 아모리족을 공연히 쳐들어가 놓고는 적반하장격으로 주님께 아뢰기를 해와 달이 그대로 서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답니다. 그래서 해와 달이 멈추자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방인 아모리족을 모조리 말살시켜 버렸다지요. 아직 인류가 철이 들기 전 하느님을 자신들의 뒷배나 보아주는 뒷골목 큰 형님쯤으로 여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19세기 미국 작가 엠브로스 비어스라는 이가 「악마의 사전」을 편찬했는데 너무도 재미있고 정곡을 찌르는 책이어서 그만 악마도 웃어버렸답니다. 그 사전은 ‘기도’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스스로 가치없다고 자백하는 단 한 사람의 탄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을 무효로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

그렇습니다. 저 옛날 옛적 여호수와만 그런 게 아니고 나 역시도 늘 그래 왔습니다. 불쌍한 죄인이라며 ‘스스로 가치없다고 자백하는 단 한 사람’ 바로 나를 위해, 시험에 합격시켜 달라고, 아버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를 물리쳐 달라고 ‘우주의 법칙을 무효로 해 달라’는 기도를 해 왔으니 말입니다.

코로나19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우주가 어디 인류만을 위해 전개돼 온 건 아니지요. 마치 저 ‘이방인’ 아모리족이 가나안에서 잘 살아갔듯이 코로나19도 그렇게 이 지구에서 나름 진화해 온 것일 뿐입니다. 137억 년 우주 역사에서 현생 인류의 출현은 길게 봐야 10만 년이고 이 문명은 2만 년 안쪽입니다. 당장 눈앞의 편리를 위해 이렇게 자연을 혹사시킨다면 정말 다음 세대 안에 한때 지구를 석권하던 공룡들처럼 우리 인류도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그저 우리 인간도 당신이 내신 세상의 일부일 뿐.

엊그제 뉴스를 보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에 최루가스를 퍼부어 길을 뚫고 교회에 가서는 자랑스레 성경을 들고 사진을 찍었더군요. 그리고 시위대를 폭도라 부르면서 연방 군대를 동원해서 가차없이 진압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저 이는 저 상황에서 왜 하필 성경을 들고 있는 걸까요. 구약성경 여호수와의 기도를 떠 올린 걸까요. 여호수와는 아모리족을 전멸시킨 후 그 다섯 임금들을 끌어내다가 군관들에게 “가까이 와서 발로 이 임금들의 목을 밟아라”하고 명령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저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이 무릎으로 9분 가까이 흑인 목을 눌렀던 것과 상황이 너무 똑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문명국이라 자랑하는 미국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확인해 가는 요즈음입니다. 그동안 미국 연방대법원은 우리에게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경찰이 공무집행을 함에 있어서 ‘합리적인 사람이 알 만한 명확히 수립된 법적,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면책된다는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경찰이 직무를 수행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일일이 명확히 법으로 규제해 놓지 않는 한, 경찰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여도 공무수행 중인 한에 있어서는 ‘무죄’랍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교회에 가서 성경을 들고 여호수와처럼 경찰과 군대에게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건가 봅니다.

인류가 차츰 철이 들어 이스라엘 족속만 선민이 아니고 가나안 이방인들도 하느님 자녀요, 사람만 당신의 지으신 바가 아니고 삼라만상이 다 그 지으신 바임을 알아가는데도, 어찌 우리가 벌이는 일들은 여전히 예와 다를 바가 없는 건지요.

하긴 예수님도 하느님 제대로 알라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이 땅에 세워 보자고 가르치고 행하시다가 종내에는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셨지요. 그러니 당신을 따른다는 우리가 왜 맨날 세상이 안 바뀌냐고 좌절하고 투덜댈 일이 아닙니다. 이 무섭게 반복되는 이기적 세상에서 나, 내 가족, 우리나라, 우리 인간이라는 ‘나’로 비롯된 이 울타리를 넘어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애쓰는 게 제자된 이들의 도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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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요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