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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70주년 특집] 6·25 참전 미군, 허먼 G. 펠홀터 군종신부의 성덕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0-06-16 수정일 2020-06-16 발행일 2020-06-21 제 3200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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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가 머리 겨눈 순간에도 병자성사…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美 군종신부로 전쟁 참전
주어진 양떼 끝까지 돌보다 부상병들과 함께 장렬히 선종
사료 토대로 선종 장소 찾아가 ‘함께하라’는 사목정신 지킨 당시 순교자적 행적 재구성

허먼 G. 펠홀터(Herman Gilbert Felhoelter, 1913~1950). 낯설게 느껴지는 이 이름은 70년 전 6·25전쟁에 미군 군종신부(작은형제회)로 참전해 적의 총탄이 머리와 등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까지 부상병들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주고 순교자의 길을 택한 거룩한 사제의 이름이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올해는 펠홀터 신부가 선종한 지도 70주년이 되는 해다. 펠홀터 신부가 군종신부의 사명을 다하고 의롭고 성스럽게 죽어 간 세종시 금남면 용담리 야산에는 그를 추념하는 작은 안내문이나 기념비 하나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성덕(聖德)만큼은 시공을 초월해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허먼 G. 펠홀터 신부 :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군종신부 가운데 가장 먼저 선종했다. 1913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나 1939년 작은형제회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44년 군종장교로 임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미국 신시내티대교구에서 사목했고 1948년 다시 군종장교로 임관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1950년 7월 16일 부상병들에게 병자성사를 주는 중에 총상을 입고 선종했다. 아래는 장교복 입은 펠홀터 신부.

1950년 7월 16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금남면 두만리 일대, 미군 보병 제24사단 19연대는 금강방어선을 뚫고 내려온 북한군 제3사단을 힘겹게 저지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참하게 기록된 전투 중 하나다. 금남면은 6·25전쟁 당시 남으로 뻗어가는 ‘1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어서 금남면 일원을 방어하느냐, 내주느냐는 전쟁 전체의 향배를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패배하고 만다.

펠홀터 신부가 자신에게 주어진 양떼를 끝까지 돌보다 북한군이 쏜 소련제 소총을 맞고 숨을 거둔 것도 이날이다. 미군 측 영문자료에서 펠홀터 신부 최후의 순간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금남면향토지」는 ‘펠홀터 군목’이라고 신분 표기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역 행정기관이 지역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공적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정확도가 높은 사료다. 국내외 사료를 토대로 펠홀터 신부가 걸어 간 순교자적 행적을 선명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1950년 7월 16일 미군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대오가 흐트러졌고, 심각한 부상병 약 30명을 포함해 100여 명의 미군들은 금남면 용담리 야산(영문 자료에는 ‘on a mountain above the village of Tuman’)으로 이동했다. 미군 지휘관은 부상병들을 옮기던 군인들이 탈진해 부상병들을 데리고는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부상병 30명 곁에는 펠홀터 신부와 군의관 린턴 J. 버트리(Linton J. Buttrey) 대위만이 남게 됐다. 펠홀터 신부는 증원군이 도착하면 부상병들과 함께 이동하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9시경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진 지 1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어둠이 깔리기 전이고 무척 맑은 날씨인 데다 반딧불이가 많아 시야는 밝았다.

기다리던 미군이 아니라 북한군이었다. 북한군임을 인식한 펠홀터 신부는 군의관 버트리 대위에게 피신할 것을 다급하게 요청했다. 버트리 대위는 피신 도중 발목에 총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총구가 펠홀터 신부를 향했을 때 펠홀터 신부는 무릎을 꿇은 채 부상병들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했고 등과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무기를 지니지 않았던 펠홀터 신부 군복에는 군종신부를 상징하는 십자 마크가 붙어 있었다. 펠홀터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은 부상병들도 이 때 한꺼번에 전사한다.

군의관 버트리 대위는 6·25전쟁 정전(1953년 7월 27일) 후 미국 상원 ‘한국전쟁 학살 소위원회’(Subcommittee on Korean War Atrocities)가 실시한 청문회에 참석해 펠홀터 신부의 죽음을 증언한다. 1954년 1월 11일 발간된 청문보고서에 기록된 미국 미시간주 찰스 E. 포터(Charles E. Potter) 상원의원과 군의관 버트리 대위의 청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터 의원: 그(펠홀터 신부)는 흰색 십자가로 군종신부 신분을 드러내고 있었습니까?

-버트리 대위: 네. 그렇습니다. 펠홀터 신부는 흰색 십자가 표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포터 의원: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버트리 대위: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포터 의원: 그는 죽임을 당할 때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버트리 대위: 부상병들에게 병자성사(last rites, extreme unction)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포터 의원: 적은 펠홀터 신부를 어떻게 죽였습니까?

-버트리 대위: 그는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역 원로 고성근씨, 이상욱 변호사, 군종교구 한밭본당 주임 윤성완 신부, 한림대 사학과 최창희 명예교수(왼쪽부터)가 6월 5일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로 예상되는 곳을 찾아 기도를 하고 있다.

고향인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성 미카엘 공동묘지에 있는 펠홀터 신부의 묘비. 미국 군종대교구 제공

가톨릭신문은 펠홀터 신부의 1950년 7월 16일 마지막 행적을 가능한 사실대로 추적하기 위해 세종시 향토사 연구가 이주열(54·세종시청 근무)씨로부터 다양한 사료를 제공 받았다. 6월 5일에는 금남면 두만1리 마을회관에서 금남면이 고향인 최창희(75) 한림대 사학과 명예교수, 정부 대전청사 관세청 규제개혁법무담당관으로 근무하며 대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이상욱(43) 변호사, 군종교구 육군 제32보병사단 한밭본당 주임 윤성완 신부가 모여 고수환(75) 이장과 두만리 지역 원로인 김익태(85)·고성근(79) 어르신으로부터 펠홀터 신부에 관한 증언을 들었다. 이 변호사는 펠홀터 신부 자료를 발굴해 본지에 최초로 제보한 인물이다.

고수환 이장과 두 어르신은 ‘펠홀터’라는 이름은 모르고 있었지만 군종장교가 전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문 자료에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가 두만리로 기록돼 있는 것과 달리 두만리와 얕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는 용담리를 선종 장소로 일관되게 지목했다.

특히 고성근 어르신은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를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하고 그 위치를 찾아가 “미군 후방 시피(CP, Command Post, 지휘본부)가 있던 곳이 여기다. 부상병들과 보급 물자가 여기 다 모였다”고 증언했다.

펠홀터 신부가 선종한 곳으로 확실시되는 용담리 야산은 두만1리 마을회관에서 1㎞도 떨어져 있지 않다. 70년 전 나무 한 그루 없던 벌거숭이산이 지금은 울창한 나무로 덮여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윤성완 신부는 펠홀터 신부 선종 장소를 찾은 이들과 함께 기도와 묵념을 한 후 “군종장교의 모토는 장병들과 ‘함께하라’는 것”이라며 “부상병과 끝까지 함께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주님께 돌려보내려고 했던 펠홀터 신부님에게서 진정한 목자의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이상욱 변호사는 “펠홀터 신부님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작은 기념비 하나라도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본지가 6월 7일 미국 군종대교구에 이메일 질의를 보내 6월 8일 받은 답변자료에 의하면 펠홀터 신부를 포함해 6·25전쟁 중 선종한 미군 군종신부는 6명이다. 펠홀터 신부를 제외한 5명은 모두 1951년 선종했고 펠홀터 신부만이 참전 10여 일 만인 1950년 7월에 최초로 선종했다. 미국 군종대교구 자료에는 펠홀터 신부 선종일이 1950년 7월 15일로 기재돼 있는데 7월 16일을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성 미카엘 공동묘지 펠홀터 신부 묘비에는 선종일이 1950년 7월 17일로 적혀 있다. 역시 전쟁의 혼란기에 7월 16일을 잘못 적은 듯하다. 펠홀터 신부가 사후에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공적조서에도 선종일이 7월 16일로 기재돼 있다.

펠홀터 신부가 선종 4일 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진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주님의 뜻이 이뤄질 거예요. 어머니의 기도가 저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기뻐요. 저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영혼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합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