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내 인생의 삽화가 그리운 날 / 이상배

이상배(마태오) 동화 작가
입력일 2020-06-16 수정일 2020-06-16 발행일 2020-06-21 제 320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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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진’의 시대다. 휴대전화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진사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사진을 찍어 서로 주고받고, 퍼 나른다. 정말이지 많이 찍고, 많이 찍힌다.

옛날, 나의 어린 시절은 사진 찍는 일이 드물었다. 귀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그때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은 오래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결정적인 순간은 아니라도 오랜 세월 속에 남아 아련한 그리움을 준다.

나는 부끄러운 사진 한 장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시간, 이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다. 산골짝에서 뻐꾸기와 산 꿩이 우는 이때쯤 계절이었다. 시골에서는 본격적인 모내기를 앞두고 하루 날을 받아 천렵을 즐긴다. 청년 농부들만 천렵을 하는 게 아니다. 누나들도 하루를 즐긴다. 음식 거리를 잔뜩 싸 들고, 양은솥을 이고 산골짝 놀기 좋은 곳으로 올라간다.

이날, 나는 누나들의 하루를 카메라에 담는 사진사로 뽑혔다. 어려도 사진기를 조금 다루었던 나에게 큰일을 맡긴 것이다.

맨날 집안일에 갇혀 있던 누나들은 먹고 노래하며 신나게 놀았다. 얌전한 누나들의 다른 모습에 나는 놀랐다. 덩달아 헤헤 웃으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둘이 짝짓고, 셋 다섯이 어깨동무하고, 팔짝 뛰는 것을 찍고, 꽃 속에서 꽃처럼 웃는 누나들을 사정없이 찍어댔다. 달님처럼 둥글고 곱고 예쁜 누나들이었다.

나는 그날의 추억을 담아내는 사진사로 특별대우를 마음껏 누렸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군것질할 사탕과 과자봉지도 받고, 공책, 연필 사라고 용돈도 받고, 누나들이 풍기는 향긋한 분 냄새를 맡았다.

해거름에 놀이가 끝났을 때, 찍은 필름은 다섯 통이나 되었다. 한 통에 36방이니 180방을 찍었다. 당시 두메산골 동네에서 찍은 사진치고는 정말 많이도 찍었다. 나는 찰칵찰칵 셔터를 누르며 기분 좋은 쾌감을 느꼈다.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카메라를 하루 종일 지니고 마음껏 셔터를 눌러 댄 것이다.

월요일인 다음날, 나는 읍내 학교에 가면서 카메라를 빌려 왔다는 사진관에 필름을 맡겼다. 공부시간 내내 사진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다.

‘잘 못 나오면 어떡하지?’

학교가 파하자 나는 단걸음에 사진관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사진 나왔어요?”

피식 웃는 아저씨의 표정이 이상했다.

“사진을 누가 찍은 거냐?”

“제가 찍었어요.”

“참 잘도 찍었다. 이거 봐라.”

아저씨가 꺼낸 든 것은 현상된 사진이 아니라 다섯 개의 길고 시커먼 필름이었다.

“다 빛이 들어갔어. 필름을 꺼내고 넣을 때 밝은 데서 하면 안 되는 거야. 이거 봐. 달랑 이 사진 하나만 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180방을 찍은 것 중 딱 한 장만 희미한 모습을 남기고 다 날아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못 들어갔다.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기다릴 누나들을 생각하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 근처 언덕에 숨어서 한숨만 쉬다가 끝내 훌쩍훌쩍 울었다.

밤이 깊어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누나들이 열 번도 더 왔다 갔다고 하였다. 정말이지 어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다음 날, 나는 이른 새벽에 학교로 갔다. 찾아올 누나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 장 나온 사진은 내가 읽던 동화책 갈피에 넣어두었다.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나는 가끔 그날의 흑백 사진을 꺼내 본다.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달님처럼 고운 우리 누님들의 모습을 담지 못한 나는 죄인이다!

오늘같이 뻐꾸기 소리 듣는 날은 내 인생의 삽화로 남겨진 빛바랜 사진 속의 누나들이 보고 싶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상배(마태오) 동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