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엄니는 안녕하셨다 / 이난호

이난호(짓다) 수필가
입력일 2020-06-09 수정일 2020-06-09 발행일 2020-06-14 제 319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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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달 만에 엄니를 뵙고 오는 길. 서울 대림역에 내려 마을버스에 몸을 부렸다. 지하철과 택시로 대여섯 시간 남짓 출입에도 심신이 푹 꺼지는 팔순 딸내미를 “새파란 것”이라 부르는 1919년생 엄니는 며느리를 주저앉히고 새파란 것은 반쯤 뉘이고 재미나게 부엌을 돌며 점심상을 차렸다.

안살림보다 동네일에 몸이 쟀던 분이다. 할머니가 엄니 버선볼을 대줬다. 할머니껜 업이 셋, 소박데기 외손녀와 친정에 들른 사이 38선이 막혀 붙박이 된 둘째 딸 모녀, 나는 그 업들에 사이에서 누룽지를 먹으며 유행가를 익혔다. 엄니가 눈 흘겼다. 소박데기가 성가를 흥얼거렸을 땐 온 식구가 눈 흘겼다. 그로부터 서른 몇 해 후 내가 성호를 긋자 시아버님이 뭔 짓이냐고 만 하셨다. 선한 농부셨다.

“이거 구로시장 가지요!?” 얼굴이 새까만 초로 아낙이 커다란 여행 백을 밀어 올리며 외쳤다. 한눈에 초행의 중국 교포, 오래전 대림역의 저들은 한 손에 종이쪽을, 한참 전부터는 핸드폰을 들고 마을버스 번호를 맞춰봤는데 여인은 맨손이다. 인근의 30여 년 된 우리 아파트가 재개발로 술렁거리고 대림역 주변 상호들은 구인구직에 무슨 법률 대행까지 교포들 축으로 돌고 난전에 가깝던 구로시장이 덮게 되어 칸칸 잘린 열의 일곱을 우리말 서툰 저들이 맡았다. 말쑥한 교포 아가씨가 괜히 무릎을 털며 내 시장바구니를 밀어냈을 땐 어라? 하는 심사였다. 내게는 저들이 처음으로 시청 지하철역에 보이차 봉지를 폈을 때 양손을 그러쥐고 울먹인 순정이 있었다.

엇비슷 대각선에 자리한 여인 얼굴이 창밖으로 옆 사람으로 기사 쪽으로 오가는 게 딱해 보였지만 꼼짝하기 싫었다. 꼬여 있었다. 짐도 없겠다 지하철 구일역에서 내려 10여 분 걸으면 집이 코앞인데 갈아타기 두어 번에 마을버스를 타다니, 씀씀이에 분수없는 나는 2인분 버스비 2000원으로 바꿀 수 있는 목록을 꼽으며 남편을 흘기다가 그저도 종종 재래시장을 들락이는 엄니의 고향 정서를 심술내고 있다. 구로시장을 앞두고 버스가 주춤거려도 청처짐한 여인, 내가 소리쳤다.

“이번에 내리세요!” 먼저 내려 여인의 짐을 당기는 일변 남편을 부축했다.

“…길 건너가 구로시장이에요!” 이제 안심하란 듯 제법 나긋이 말했는데

“감사합니다.” 짐을 챙기는 여인은 차분하다.

“…알아요. 여기서부터는. 전에 많이 와봐서….”

여인은 태연히 걸어갔다. 우리 집은 네 정거 앞인데.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있지?” 혼잣말이 남편에게로 나갔다. 한 해전까지도 “고기도 먹어 본 놈이…” 평소 사분대지 못했던 내 선선한 시늉을 잔뜩 비틀었을 남편은 “난 잘못 한 거 없어!” 해봐도 “당신은 항상 옳지.” 속을 뒤집어오지 않았다.

엄니는 몸 성한 걸인을 트집부터 했지만 할머니는 ‘오죽하면…’ 엄니를 누르고 작은 상을 차렸다. 난 엄니가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니 말에 수굿한 건 딱 두 번, 그때와 “몸 지킨 계집애는 언제고 큰소리친다”는 말에서 뿐, 편편찮은 사이였다. 부엌을 겉돌아도 평판에 올랐던 엄니 손맛은 많이 헐거워졌지만 비운 식기를 보여 효도했다. 달거리 하듯 한 달에 한 번 모녀는 그렇게 응석을 나누고 헤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세상사 함부로 언약을 짓지 말자 단단히 맘먹어도 돌아보면 거기 엄니가 섰을 때 기어이 지르고 만다. 또 오께-. 매번 성호는 긋고 있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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