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우리 안의 결단 / 황소희

황소희(안젤라) (사)코리아연구원 객원연구원
입력일 2020-06-09 수정일 2020-06-09 발행일 2020-06-14 제 319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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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장군님(?)은 정말 축지법을 쓰셨을까. 북한 당국이 지난 5월 20일 공식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통해 이 의문을 부인하는 입장을 밝혔다. “축지법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아니며, 만약 장군님께서 축지법이 가능했다면 그것은 인민 대중의 도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북한의 변화를 보도한 국내 언론은 북한 주민과 당국의 관계 차원에서 이번 현상을 해석했다. 북한 내부에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남한 콘텐츠를 즐기는 주민이 많아지자 지도자가 애민(愛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거나, 하노이 회담 등 대외 협상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고 분석됐다.

개인적으로 북한 당국이 보여준 선대 지도자에 대한 부정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다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예외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북한에서 현재의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 기반인 이전 지도자를 부정하는 것은 과감한 결단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렵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치적 정당성이 그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수령의 카리스마와 항일 빨치산 활동을 승계한 맥락 안에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외려 과거 지도자에 대한 부정은 현재의 리더십이 흔들릴 가능성마저 감내하고 바뀌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 관광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여행객에게 김 수령의 항일 활동을 홍보하고, 이를 주민에게 선전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면 현재는 북한 당국은 강원도 원산 갈마 지역에 ‘자본주의적 황색 바람’의 첨병인 카지노를 도입하려고 여러모로 노력 중이다. 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0월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진한 금강산 관광의 방식에 대해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금기를 깬 것이다.

여전히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대화는 진전되지 않고 머물러 있다.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한반도의 긴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요란스러웠을 뿐 결과물이 없다는 비아냥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북한의 이번 축지법 부정은 김 국무위원장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 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부인하면서까지, 그들이 자신에게 물려준 북한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기대하게 한다. 섣부르다 해도 희망적이다.

어쩌면 북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치열하게 변화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우리가 아닐까. 분단에 너무 익숙해져 행여 용기 내어 바뀌려는 그들을 비웃고 말아 버리는 마음이라면, 성경은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히브 3,8)이라고 채근한다. 지나칠 수도 있었던 이번 일화는 북한의 변화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마음의 변화에 대한 결단의 주체임을 상기시키는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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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희(안젤라) (사)코리아연구원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