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명예기자 단상] 누군가 다급하게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면…

오안라(안나) 명예기자
입력일 2020-05-26 수정일 2020-05-26 발행일 2020-05-31 제 319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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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아기를 업고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한 자매였다. 신발도 채 신지 못한 것으로 보아 다급한 사정이 있어 보였다.

집 안에 들어온 자매를 찬찬히 살펴보니 안면이 있는 듯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입교 희망자가 있다”며 구역장인 내게 선교부탁이 와서 일터를 방문한 적이 있던 K자매였다. 예비신자 입교식에 함께 가겠다고 약속이 됐는데 당일 찾아가니 “남편이 반대한다”며 입교 약속을 미뤘었다.

문을 두드린 그날, K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다급하게 옆 동의 승강기를 타고 옥상으로 건너와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마침 꼭대기 층인 20층에 살고 있는 필자의 집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K의 입교를 부탁했던 지인도 왔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업고 걸려야 하는 어린아이를 두고 생계를 책임지며 가정을 지켜온 K자매, 오랜 시간 K에게 신앙생활을 권해왔던 지인, 두 번이나 자매와 인연을 갖게 된 필자,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모두의 침묵 속에는 각자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식사도 마다하고 고개를 숙이고 필자의 집을 나서던 K자매의 뒷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성당마당에서 K자매와 가족들을 만났다. ‘업고 있던 아기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며 남편과 함께 예비자 교리반에 입교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하느님께서 꺼뜨리지 않으신 작은 불씨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비자 교리가 끝나갈 무렵, 본당신부님께서는 교리개근까지 한 K자매가 “아직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우려의 말씀을 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지만 K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K자매가 남편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 가정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소식이 끊어졌는데 얼마 전 그 막내가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고 ‘자기 자신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희망’이며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고들 한다. 신(信)·망(望)·애(愛) 3덕(德)의 길인 신앙의 길에서 오늘도 K자매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K자매가 기다림 끝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길에 들어섰기를 희망해본다.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오래전 그 시간도 사랑과 믿음과 희망의 길이었다고 확신해본다.

필자는 여전히 그 자매가 문을 두드렸던 꼭대기 20층에 산다. 누군가 다급하게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줄 신앙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하느님은 열려있는 신·망·애 3덕의 길을 통해 오늘도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해 나가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서로 걱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거리, 신앙의 거리는 놓치지 않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묵시 3,20)

※ 가톨릭신문 명예기자들이 삶과 신앙 속에서 얻은 묵상거리를 독자들과 나눕니다.

오안라(안나)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