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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5월 광주의 ‘김 군’ / 김형태

김형태(요한),변호사
입력일 2020-05-26 수정일 2020-05-26 발행일 2020-05-31 제 319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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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김지하 시인의 ‘새봄 3’이란 시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음에 이른 것을 ‘한 소식’ 했다고 하던데 이 시를 소리 내서 몇 번 읽노라면 나도 한 소식 한 듯 흙도 물도 새도 나와 한 형제 같기도 하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 같기도 해서 잠시 마음 편해집니다. 그 옛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형제인 햇님’과 ‘누이인 달과 별’ 그리고 바람, 공기, 물, 불로, 주님 찬미 받으시라 노래했지요. 그래서 새들도 당신 손에 날아와 놀았다지요.

지난 4월 모판에 뿌려 놓았던 봉숭아며 금전화, 백일홍 씨들이 스무날이 지나도록 도통 감감무소식이더니 요 며칠 새 비를 맞아선가 빼곡히 머리를 들이밀고 올라왔습니다. 이것들을 마당에 옮기는 과정에서 남은 새순들을 땡볕 아래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라. 얘들도 다 한 목숨이요, 잘 심어 놓으면 여름 내내 하양, 분홍, 선홍빛 꽃 피우고 무성할 것을….

40년 전 이맘때쯤 친구와 함께 광릉 인근 조그만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산천초목 온통 푸르른데 방구석에 들어앉아 딱딱한 법서나 뒤적이는 제 청춘이 못내 한심했나 봅니다. 옆방에서 내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신경 쓰인다고 투덜대고 참새가 짹짹거리는 게 시끄럽다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 지붕에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형사들이 절에 들이닥치더니 전라도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며 혹시 우리가 도피자들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친구와 내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그 시각에 광주에서는 국민들에게 총칼을 들이댄 무도한 군인들에 맞서 우리 또래 청춘들이 의연히 제 목숨을 내놓았던 거였습니다.

엊그제 5·18 40주년 기념 ‘김 군’이라는 다큐 영화를 보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나와 친구는 그 뒤 고시에 붙어 인권변호사네 검사네 대접받으며 살았지만, 당시 내 또래, 아마도 고아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김 군’은 광주 송암동 어느 농가 마당에서 군인한테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 암매장됐고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없어 그저 ‘김 군’으로만 기억됐습니다. 그리고 내 친구는 검사 노릇 몇 년 하다 중병에 걸렸는데 죽기 얼마 전 문병 간 이에게 병이 나으면 검사 때려치우고 변호사나 돼 약하고 힘든 이들을 위해 살아가겠노라 다짐을 했었답니다.

40년 전 저 ‘김 군’이나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밤을 맞았던 이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묵묵히 그 길을 갔으니 언감생심 나나 내 친구는 꿈도 꾸지 못할 진정한 예수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성경을 읽어 가노라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은 왜 죽음의 길을 골라 가셨을까?’ 유다교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도 나름 열심히 하느님을 섬긴다고 섬기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들을 꾸짖고 정면으로 맞서셨을까? 좀 더 완곡하게 그들을 설득하고 가르치실 수는 없었을까? 하실 말씀 다 하시지 말고 좀 참으실 수는 없었을까? 급기야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를 반복하시고 성전에서 탁자와 의자들을 둘러엎으셨으니 당신은 그저 죽음의 길을 찾아가신 게지요.

왜 그러셨을까. 사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온통 이기주의에 푹 빠져 버린 이 세상을 깨우치시려고 당신 목숨을 거신 거지요. 아니, 전체이신 하느님 뜻만을 온전히 드러낼 뿐 예수라 불리는 ‘나’라는 에고는 없었기에, 애시당초 걸 목숨도 없이 훌쩍 죽음을 넘어서신 거라고.

당신은 이리 말씀하셨지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저 5월 광주의 ‘김 군’은 말만 번지르르한 우리와 달리 당신 말씀과 행실을 그대로 따라간 이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