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40주년 ‘5·18’… 부끄러운 우리 교회 / 김지영

김지영(이냐시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빙교수
입력일 2020-05-19 수정일 2020-05-19 발행일 2020-05-24 제 3196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올해 한국 천주교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광주 임동주교좌성당에서는 여러 교구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희중 대주교의 주례로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엔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5·18 기념미사에 이렇게 많은 교구장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고, 염수정 추기경이 참석한 것도 처음이다.

왜 올해 따라 이렇게 많은 고위성직자들이 기념미사에, 그것도 광주에 오셨을까? 40주년이라는 연대기적 의미 때문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전에 너무들 안 오셨을 뿐이다.

깊은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외면들을 하셨다. 그런데 바로 지금은 민주당이 탄탄하게 집권하고 있으며, 5·18은 국가적으로 그 역사성을 자랑스럽게 뿌리내리고 있다. ‘대세’가 된 것이다.

진리수호는 교회의 의무이건만, 한국 천주교회는 40년 전에도 진리보다는 대세를 더 의식했다. 군부의 인권탄압이 광주에서 극치에 달해 죄 없는 시민들이 처참하게 만행에 압살당하고, 민주주의가 함께 스러져갔음에도.

당시 광주대교구 외의 한국 천주교회 대부분은 광주의 진실과 아픔을 외면했다. 항쟁 초기에 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가 주교회의에도 진실을 증언했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이하 주로 윤선자 전남대 교수의 기록에 따름) 5·18 참극에 대해 처음으로 교회의 공식 의견을 밝힌 건 윤 대주교의 특별서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를 믿으며’였다. 이어 6월 1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문서를 작성, 사태의 원인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이었음을 강조하고 이를 전국의 모든 교구에 인편으로 발송했다.

홀로 분투하던 광주 사제단은 2년 뒤 5월 18일엔 성명서 ‘광주 항쟁 2주기를 맞는 우리의 결의’를 발표하고 진실규명과 구속자 석방, 부상자 대책, 책임자 문책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다시 2년 뒤에는 그동안 ‘광주사태’라고 불렸던 항쟁을 ‘광주의거’로 정의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도 광주대교구와 전주교구 외의 대부분 교구는 줄곧 방관하는 태도였다. 이에 정의구현사제단은 1990년 5월 18일, 성명서 ‘우리의 고백과 기도’를 발표, 광주의 진실과 아픔을 외면하는 한국천주교회를 비판했다. 교회의 방관자적 태도는 물론 각 교구 고위성직자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97년에 들어서야 평신도협의회가 광주 사제단과 함께 기념미사를 주최했다. 성직중심주의가 유독 강한 한국 천주교회의 풍토에서 평신도들이 교구 고위성직자들의 판단을 배척하고 행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위해 행동하는 건 ‘지금 여기에서’라고 배운다. 순교자들을 그토록 현양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종종 역사의 고비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나중에 저기에서’ 하겠다고 미룬다.(물론 1980년대 후반 민주화 과정의 공로는 매우 컸다.) 눈앞에서 진리가 파괴되는데도 방관하는 이유에 대해선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수십 년 뒤, 또는 수백 년 뒤 대세에 따라 ‘지난날의 과오’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일은 이제 관행이 되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직후에도 그러했다.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개별적으로 기도하고 봉사를 했지만 교구차원에서는 방관 그 자체였다. 이 역시 ‘정치적 중립’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고통에 중립은 없다’고 대못을 박아버렸다. 박근혜 정권에서 문재인 정권으로 바뀐 뒤 처음 맞는 세월호 사고일에는 전국 각 교구의 교회가 돌연 세월호 추모행사로 떠들썩했다.

일제 강점기 때의 반민족적 행위에도 ‘정치적 중립’이라는 궤변이 동원됐다. 앞장서서 해방을 선포하는 게 마땅한 도리인 한국 천주교회였지만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못하게 했다. 심지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종용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교회가 진리보다 대세를,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나중에 저기에서’를 찾는 이유가 겉으로는 ‘정치적 중립’이지만 실제로는 ‘체제보장’때문이라 한다. 사실일까? 교회가 시대의 진실과 고통을 맞바꾸어 얻는 체제보장이라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을까. 그것이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한 가지 정체성일까.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영(이냐시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