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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심는 사람들] <86> 죽산 전교회장 오용남씨

최창우 기자
입력일 2020-05-07 수정일 2020-05-07 발행일 1989-03-19 제 1647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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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땅에 신앙활성화 위한 초석놓아
“죽산성지 대지매입이 마지막 소원”
「순교자현양성당」신축사업 주도하기도
 
수원교구 죽산본당(3백50여 세대)의 신자들은 오용남(사라ㆍ63)씨를 두고「죽산의 대모」라고 부른다.

주위에서 오씨를 더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오씨에게「생활하는 성녀」「살아있는 순교자」란 칭호를 붙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오씨는 신앙의 불모지 죽산땅에 성당이서고, 신앙이 활성화되도록 초석을 놓은 전교회장이다.

오씨가 죽산땅을 처음 밟은 것은 79년8월이었다.

당시 죽산공소는 신자가70세대로 기록됐으나 거의 모두가 냉담자로서 헐어빠진 건물이나마 공소로 모이는 이가 거의 없었다.

경기도 안성군의 동쪽끝에 위치한 죽산은 외진곳이며, 고냉지대라 농사도 잘되지 않아 생활하기가 어려웠을뿐 아니라 인근 골짜기마다에 모여 사는 수십호 가구중 1~2세대의 신자들이 수십리씩 걸어서 공소로 모이기에는 꽤나 어려운 탓도 있었다.

이밖에도 한국땅에서 손꼽히는 박해시대의 처형지 죽산땅에는 1백20여년 전 병인대박해 때 무수히 많은 이들이 목졸려 죽거나 그대로 생매장당한「잊은 터」라는 형장이 있어서인지 천주교를「공포의 대상」혹은「혐오하는 이름」으로 전해져 형장의 이름처럼 천주교도「잊혀진 종교」정도로 여겨온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해가 지나간 지 70여년이나 된 1932년까지 주산을 비롯 인근지역에는 단 한명의 신자도 기록되지 않았던 신앙불모지이다.

이 메마른 땅을 찾아온 오씨는 묵주를 몸속에 깊이 감춘 채 산을 넘어 인가들을 찾아다니며 농사일과 집안일을 해주며 냉담자들을 일깨우고 복음을 전해갔다.

차차 주민들이 공소로 모이기 시작하자 오씨는 예비자교리반을 개설하고 신자들이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도록 철야 기도회를 개최하는 한편 순교자현양성당의 신축을 위한 작업도 주도했다.

3년여 만에 완공된 죽산성당은 건립비의 절반가량을 오씨가 서울등지서 직접 모금해 왔을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말이 전교회장이지, 오씨에게 봉급을 줄수 있는 여건도 또 교통비를 받을 생각도 없던 오씨는 오히려 자신의 사재를털어 신자들의 길흉사를 돌보아주고 성경과 성물을구입해 줬던 것이다.

이같은 오씨의 선행에 감복, 본당신자들은 3년 전 오씨의 회갑때 환갑상을 차려주고 그 자리에서 신자들이 오씨에게 큰 절을 했다.

이 자리에는 사제도 10여명이나 참석, 오씨의 노고를 위로하고 자리를 빛내주었다.

결혼한지 1년만인 22세에 남편을 여의고 영등포의 방직공장 서무과직원으로 일하다 38세 되던 해, 외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고 난 오씨는 이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다. 본당신부의 권유로 전교회장에 나서게 된 오씨는 서울의 이태원ㆍ아현동ㆍ수유리본당등지서 활동하다가 순교자들의 얼이 숨쉬는 죽산땅에서 10년 전부터 순교자처럼 자신의 사재를 비롯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다.

자신을 돌보는데는 지나치게 인색, 의사로부터「영양실조」란 진단을 받고 현재 중병에 걸린 채 죽산성당의 한 모퉁이방에서 기도에 전념하는 오씨는 죽산성지개발을 위한 일념을 담은 피같은 말을 쏟고 있다.

『순교자현양성당은 완공됐으나 순교자들이 생매장 당하던 땅을 매입 못해, 바로 그 자리 그 터에서 소들이 풀 뜯어 먹을 판이니 죽어서 순교자들을 뵐 낯이 없다』며 고개를 떨구는 오씨의 마지막 소원은 죽산성지의 대지매입이다.

<崔昌瑀 기자>

최창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