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19) 크림 든 소보로빵

고유경 (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
입력일 2020-05-04 수정일 2020-05-06 발행일 2020-05-10 제 319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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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조금만 더 섬세하게 마음을 표현했다면…
‘아 그거였구나!’
남편도 그동안 놓친 게 무엇인지 왜 아내의 반응이 냉랭했었는지 깨달았다며 허허 웃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 마음이 가닿지 않았을 뿐

작년 여름부터 친정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우리 집에 온 뒤로 엄마는 문화 충격을 자주 받으시는 눈치다. 사위가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는 걸 너무 불편해하신다. 사위가 설거지할 때 소파에 편히 앉아 TV를 보는 딸에게 눈을 흘기며 부엌에 가서 안 해도 되는 행주질을 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신다. 별것도 아닌 밥상을 받고 연신 맛있다고 할 때마다 ‘저런 사람도 있나?’하는 표정으로 사위를 바라보신다.

사위의 말과 행동에 감동할 때마다 엄마는 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어김없이 소환하신다. “너희 아버지는 한 번도 설거지를 해준 적이 없다. 나한테 저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적도 없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 그럴 때마다 돌아가신 뒤에도 엄마에게 원망을 듣는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좋은 추억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엄마가 모두 안타깝다. 이분들 딸로 자라 왔던 내 마음속 상처도 함께 소환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봐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참 안 맞는 부부였다. 섬세하고 예민한 엄마는 아버지가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소리를 질렀다며 마음을 다치고, 과묵한 아버지는 엄마가 꺼내 놓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성가시고 공감이 가지 않으셨을 것이다. 딸인 내가 볼 때도 ‘도대체 이분들은 서로 사랑하긴 하는 걸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애정 표현 없이 사셨다.

사랑이 없지는 않았다. “아버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셨어요?”라는 사위의 질문에 서슴없이 결혼을 반대했던 할아버지가 결혼을 승낙하셨을 때라는 아버지의 대답을 들었을 때 아버지도 엄마를 참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 아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두 분이 왜 그렇게 사랑 없는 부부처럼 사셨을까?

몇 년 전 ME 부부 모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유독 표정이 굳어있는 한 선배 부부가 계속 신경 쓰였다. 모임 때마다 아내는 서운한 점을 쏟아냈고, 남편은 말없이 불편한 표정을 지어 분위기를 싸하게 하더니 급기야 일이 터졌다. 아내의 불만을 더는 참지 못한 남편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말을 계속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화내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자리에 앉혔다.

남편도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다. “나도 아내가 애쓰며 산 걸 잘 알아요. 그러나 나를 저렇게 나쁘게 매도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요. 나도 나름 한다고 했는데 저 사람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서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어요.” 그 말에 발끈하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늘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애쓰는 게 안쓰러워 아내가 좋아하는 소보로빵을 일부러 시내 유명 빵집까지 가서 사다 주곤 했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먹지도 않고 냉장고에 처박아 두더라고요. 아들이 사다 준 빵은 잘 먹으면서요. 그걸 볼 때 마치 내 정성과 마음이 통째로 냉장고에 처박힌 것 같은 서운한 느낌이 들어 다시는 사다 주지 말자고 결심했어요.”

그 말이 아내를 더 화나게 했던 것 같다. “당신은 늘 그랬어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요. 소보로빵도 그래요. 내가 좋아하는 소보로빵은 그게 아니에요. 난 동네 빵집에서 파는 크림이 들어 있는 소보로빵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늘 엉뚱한 소보로빵을 사 왔어요. 그때마다 이 사람은 나한테 도대체 관심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더 화가 났어요. 차라리 안 사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쳐다보기도 싫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그거였구나!’ 남편도 그동안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왜 아내의 반응이 그렇게 냉랭했던 것인지 깨달았다며 허허 웃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 마음이 가닿지 않았을 뿐.

어쩌면 그냥 소보로빵과 크림이 들어 있는 소보로빵의 차이만큼만 더 섬세하게 마음을 표현했다면 우리 부모님도 더 행복하셨을지 모른다.

고유경 (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