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이 ‘재미있는 지옥’을 살아가는 법 / 김형태

김형태(요한),변호사
입력일 2020-04-27 수정일 2020-04-28 발행일 2020-05-03 제 319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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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셋은 돼야지.” 아버지는 늘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둘이 싸울 때 가운데서 말리고 화해시킬 또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죠. 아버지는 지론대로 나와 여동생, 남동생 셋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세 형제가 서로 존중하며 잘 지내라는 당신 뜻과는 달리 ‘잘난’ 맏이의 압도적인 독재로 다른 두 동생은 언감생심 형에게 자기 생각을 못 폅니다. 하지만 그런 나도 가끔 아쉬울 때가 있어서 막내에게 여동생과의 중재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총선이 끝났습니다. 의원정수 총 300석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이 180석,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이 103석을 차지하고 나머지 정의당, 무소속 등이 겨우 17석뿐이어서, 둘이 싸울 때 가운데서 말리고 타협안을 낼 만한 세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덩치 큰 두 당이 죽어라 싸우면 국민들도 둘로 갈려 죽자사자 싸우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 후보자 투표만을 기준으로 보면 전체 유권자의 약 50퍼센트가 민주당을, 40퍼센트가 통합당을, 10퍼센트가 정의당을 지지했습니다. 이런 유권자들 뜻을 그대로 국정에 반영하려면 민주당 150석, 통합당 120석, 정의당 30석이 됐어야 합니다. 그런데 승자 독식 소선거구제로 수도권 통합당 지지 표들이나 영남지역 민주당 표들은 모두 죽은 표가 된 거죠. 그래서 국민의 뜻을 잘 반영할 수 있는 비례대표제도가 민주주의의 필수요건인데도 이를 죽어라 반대만 한 정당은 결국 제 발등 제가 찍은 겁니다.

엊그제 도봉산을 오르는데 코로나 덕에 대기가 맑아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고, 드문드문 흰 구름 흘러가고, 건너편 능선이며 계곡을 가득 덮은 연두빛 나뭇잎 물결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군무를 추더군요. 하늘, 산, 구름, 연두빛 물결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나’. 그 순간 그저 모두가 한 몸이었더랬습니다.

절 초입 돌기둥에 새긴 글귀 그대로였습니다. “천지동근(天地同根), 만물일체(萬物一體)” 하늘과 땅이 한 뿌리에서 났고 만물이 한 덩이라. 불교 화엄사상인데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내신 한 형제’라는 예수님 가르침과 똑같지요.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한 뿌리이긴 해도, 이 세상에 제각각 다른 몸으로 나오면서 얼굴도, 생각도, 성격도 다 달라지니 여기서부터 ‘재미있는 지옥’이 시작됩니다. 요즘 마당에 한창 노란 꽃대가 올라오는 보리뱅이를 두고 노모는 잡초들이 너무 기승이라고 꽃대를 댕강댕강 자르고, 나는 “보기 좋은데 그냥 좀 놔두시라”고 옥신각신합니다. 제일 가까운 모자지간이 이럴진대 보수와 진보 사이 다툼은 오죽하겠나요. 오늘 아침 서울 서초동 법원 앞을 지나는데 이런 플래카드들이 여럿 걸려 있더군요. “나 민주당 안 찍었다. 경제 망치면 니네들이 책임져라” ‘얼마나 속상하면 저럴까’ 그 속내는 이해가 갔습니다. 정말 이 세상은 재밌는 지옥입니다.

우리 모두 한 뿌리 한 몸이라 가르치는 종교도 그랬지요. 선불교에서는 우리 마음 본바탕이 본래 여러 분별에 휘둘리지 않고 청정하며, 이걸 알아보는 게 깨침이라 합니다. 그런데 ‘단박에 깨침’을 주장했던 당나라 때 스님 혜능은 ‘꾸준한 수행’을 강조한 신수스님 제자들이 죽이려고 쫓아오자 한밤중에 나룻배 타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이런 혜능을 내세운 성철스님은 우리나라 선(禪)의 시조격인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돈오점수(頓悟漸修,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 단계가 따름)를 가르쳤다며 힐난하고 그 책을 일체 못보게 했더군요. 그리스도교는 불교보다 몇 갑절 더했지요. 2000년 역사에 교리 다툼이나 전쟁으로 죽고 감옥 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한 형제입니다. 하지만 제각각입니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제각각’들의 ‘이익’과 ‘생각’을 합리적으로 잘 조정해 내는 게 바로 정치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흑백 딱 둘로 나눠 우리 편인지 아닌지만을 기준 삼아 우리 편의 ‘이익’과 ‘생각’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은 좀 거창한 표현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아 왔습니다.

부디 이번 선거에서 배가 많이 부른 맏이는 아량을 베풀어서 동생들 말도 좀 들어 주고 틀린 소리 해도 잘 토닥이며 감싸 안고 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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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요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