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9년째 사는 필리핀 출신 제랄딘 퀴란테(Geraldine Quirante·37)씨는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을 낳는 과정에서 그에게 형제자매가 되어준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로 살며 어려운 처지에 있던 제게 특히 교회는 가족을 만들어주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제랄딘씨는 여기서 느낀 따뜻한 사랑이 필리핀에 돌아간다 해도, 또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마음속에 기억될 것임을 안다. 그 안에서 느꼈던 하느님 체험 역시 늘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랄딘씨는 필리핀 루손 섬 남동쪽 마스바테에서 태어났다. 필리핀에서도 가장 가난한 계층이었던 부모의 삶은 그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소작농이었던 아버지 수입으로는 어머니와 제랄딘씨를 비롯한 세 명 형제의 끼니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섯 살 때 민도르 섬으로 이사했지만, 가난은 계속됐다. 하루에 두 끼, 소금과 기름을 곁들여 밥을 먹을 수 있다면 행운이었다.
열 살 때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마닐라 소녀의 집에 가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5년 동안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직업교육을 함께 받았기에 졸업 후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전자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과 한국으로 떠나고자 하는 꿈은 이때부터 품었다.
2012년 한국에 도착했다. 고국을 떠나기로 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가난한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부모님을 부양하고 싶었다. 위의 언니들은 자녀가 많아 친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한국은 아시아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외국인 노동자 임금이 높았고 고향과 멀지 않다는 점에서도 이끌렸다.
기대했던 한국 땅을 밟았지만, 정작 일하게 될 공장을 마주했을 때 실망감은 컸다. 큰 공장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바람과는 달리 4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일하는 작은 종이 공장이었다.
이때부터 타국에서의 녹록치 않은 삶이 시작됐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교구 이주사목위원회 광주엠마우스 공동체(이하 공동체)는 그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돼 주었다. 남편도 이곳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던 중 만났다.
공동체는 그가 혼인성사를 받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이다. 결혼식 치를 비용이 없었던 상황에서 공동체는 제2대리구 광주본당과 협의해 혼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다. 아들 율리우스를 제왕절개 수술로 낳을 때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