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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중독과의 만남 2 / 이중교 신부

이중교 신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입력일 2020-04-21 수정일 2020-04-21 발행일 2020-04-26 제 319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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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시간이 다가오자 여덟 분 정도의 남자, 두 분의 여자 선생님이 모여 앉았다. AA 모임은 먼저 AA 서문과 12단계와 12전통,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책을 돌아가며 읽은 뒤 개인의 경험담을 나눈다. 정확히 한 시간의 모임을 지키기에 보통 4명 정도의 경험담을 들으면 모임이 끝난다.

‘저분은 패션 스타일이 독특하시네. 왕년에 좀 노셨던 분이신가.’

‘저 젊은 여성분은 왜 이 모임에 나온 거지? 젊은 여성들도 알코올중독에 걸리는구나.’

‘문 선생님은 역시 예상대로 조폭 출신이구나. 거침없이 욕을 내뱉으며 경험담을 말씀하시네.’

‘아…, 저분은 아직 회복 중이신가 보네. 실내가 이렇게 따뜻한데 몸을 자꾸 떨고 계시네.’

어느새 처음의 긴장은 모두 사라지고 찬찬히 한 분 한 분의 옷과 신발 그리고 표정들을 들키지 않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라진 긴장만큼 사라진 무엇을 느꼈다. 바로 이 모임 참석의 이유였다. 사제로 살아온 지 짧지만 그래도 10년이다. 첫 모임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 이분들의 간절함이었다. 이분들은 살기 위해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어떤 동호회 성격으로 모이는 것도 아니며, 친분을 쌓기 위해 시간을 내서 온 것도 아니었다. 살기 위해 애쓰는 분들 경험을 통해 나의 개인적 목표를 채우는 건 그분들에 대한 도리도 아니며 사제의 양심에도 편치 않은 일이다. 괜히 처음에 세 분 선생님에게 연구자로서 왔다는 이야기해서 그분들에게 불편함을 끼친 건 아닌지 후회까지 되었다.

‘첫 모임인 오늘을 마지막 모임으로 하고 다른 중독이나 다른 주제를 알아봐야지. 끝나자마자 인사만 드리고 자리를 떠나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마지막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를 마친 뒤 일어나려는 순간,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서 이제까지 많이 느꼈던 신자분들의 간절한 눈빛을 똑같이 볼 수 있었다.

‘신부님. 저는 OOO이라고 해요. 원래 이렇게 자기 이름 여기에서 밝히면 안 되는데. 저도 신부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신부님, 저도 미국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었습니다. 사례 연구하시나 봐요. 나중에 편안한 시간 말씀해 주세요. 이건 제 명함.’

‘음…, 음…, 아까 너무 욕을 심하게 해서 놀라셨죠? 경험담만 이야기하면… 신부님…, 저 같은 사람도 신부님과 이야기할 수 있나요?’

아무도 모르게 처음처럼 로만칼라를 만지작거렸다. 천주교 신자분들도 계셨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도 사제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다니. 그분들의 예상치 못한 두드림에 내 인생에 중독이라는 만남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

이중교 신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