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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한단지보(邯鄲之步) / 전형민

전형민(요한) 소설가
입력일 2020-04-07 수정일 2020-04-07 발행일 2020-04-12 제 319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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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보(邯鄲之步). 옛날 중국 전국시대(BC 403~BC 221) 연나라 청년이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가서 살면서, 그 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웠는데, 그 걸음걸이가 몸에 배기 전에 귀국하게 되자, 고향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려 기어왔다는 고사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십자가에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원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은총 없이는 지을 수 없는 타고난 오류로 가득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고갈되지 않는 고뇌의 원천이 있는데, 이 고뇌는 인간의 운명으로서, 수요·결핍·비애·고통 그리고 죽음의 모습으로 인간을 괴롭힙니다. 따라서 인간은 실현되지 않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게 되고, 이런 노력이야말로 의지의 유일한 본질이기 때문에, 목표에 도달하여도 노력은 끝난 것이 아니며, 새로운 모습으로 욕망을 갈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노력은 최후의 만족을 얻지 못하고, 결국 저지당함으로써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뇌를 추방하려고 쉴 새 없이 노력하지만 이 노력은 고뇌의 모습을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의 고통은 다른 고통에 의해 추방되어 지금까지의 고통이 없어지면 새로운 고통이 나타납니다. 고뇌의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동안 그 가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다르게 보이고 비슷한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는 쉴 새 없이 생을 갈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결여는 모든 기쁨의 선행 조건이지만, 만족과 동시에 소망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만족이나 행복은 어떤 고통 어떤 궁핍으로부터 해방 이상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에서 소망으로 지칠 줄 모르고 노력하고, 얻어진 만족이 아무리 많은 것을 약속한다 해도, 결국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곧 굴욕스런 과오로 나타날 수 있고, 또 우리들이 ‘다나이데스’ 자매들의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새로운 소망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실현되지 않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욕망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러한 욕망은 결국 저지당함으로써 끝날 뿐이며, 그대로 놓아두면 무한히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서민과 상류사회에 모습을 달리하고 나타나는데, 생의 배려 즉 곤궁은 서민의 쉴 새 없는 채찍이지만, 곤궁에서 자유로운 상류사회에도 채찍이 있기 마련으로, 이는 서민의 채찍보다 더 가혹한 권태라는 모습으로 나타나, 쾌락으로 보상받으러 감각적 자극을 찾아 헤매며 욕망을 갈구합니다. 이때 진리에 따라 쾌락에 따르는 고민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진 자의 고뇌로 나타납니다.

기이한 허영심을 품고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승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올바르게 살지 못하고, 우리가 믿고 기도할 때, 믿음을 준 그분이 도와주지 않으면 올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어정쩡한 모습이 아닌 참 신앙인으로 은총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형민(요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