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의연히 당신 품으로 돌아갈 일입니다 / 김형태(요한)

김형태(요한),변호사
입력일 2020-03-31 수정일 2020-03-31 발행일 2020-04-05 제 318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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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쿠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영화 ‘서편제’ 덕분에 널리 알려지게 된 단가 ‘이 산 저 산’의 첫 대목인데 요즈음 구구절절이 바로 내 노래입니다. 그래서 수십 년 세월 주말마다 오르는 북한산, 도봉산에서 ‘이 산 저 산 진달래 산수유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흥얼대며 다닙니다. 그래, 나도 어제는 청춘이었는데 언제 이리 백발 됐는고.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 너무 애달파하덜 말고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이세. 그저 무심히….

엊그제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 전 당신이 차려줬던 밥상이 생각나서 하루 일 접고 산에까지 따라갔다 왔습니다. 오가는 길에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잔치가 벌어졌더군요. 파킨슨병으로 10년을 요양병원에 누워 계시면서 마지막 3년은 아들 며느리도 몰라봤으니 편히 잘 가신 거라 위안도 해 봅니다. 아침에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있었고 산에서도 여러 예절이 있었는데 의식을 주관하는 신부님이고 연령회원들이고 시종일관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겠고 살아 있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성경 구절을 반복하더군요. 사랑하는 어머니,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남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겠지요. 하지만 장례미사에 한두 번 참석한 게 아닌데 이날따라 갑자기 이렇게도 부활을 간구하는 우리가 참 안쓰럽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죽더라도 꼭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고 발버둥 치는 걸까요.

친구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시면 어느 때 모습일까. 일제 강점기 충주 어느 시골에서 산 넘고 내 건너 학교 다니던 ‘국민학생’으로? 아니면 아들 친구 밥상 차려 주던 50대 초반? 아니면 아들도 몰라보던 말년의 모습으로? 생전에 괄괄하던 그 성격으로 부활해서 자식, 며느리와 가끔씩 한바탕 하실런가. 부활을 간구하는 이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로 외모와 성격이 정해지고, 사회생활을 통해 이런저런 학습을 받아 형성된 일시적, 잠정적 산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정 외모, 성격, 환경인 ‘나’가 부활한다? 그러면 못 생긴 사람은 부활해서도 못 생기고, 머리가 나쁜 사람은 부활해서도 머리가 나쁘고, 성격이 불같은 사람은 부활해서도 그럴 테니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나요. 그게 아니고, 부활하면 잘 생기고 예쁘고 착하고 머리 좋고 마음 넓은 상태로 바뀐다면 그건 이미 ‘나’가 아니니 ‘내’가 부활하는 게 아닐 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유다 풍습에서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는 거냐는 물음에 그때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답하신 게지요. 생전과 똑같은 개체로 부활하는 게 아니고 마치 바다에서 솟구친 물결 하나가 사라져 다시 바다 전체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걸 유다인들이 믿는 ‘천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신 거라 믿게 됐습니다.

그날 봄볕이 제법 따가운 산소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성가를 부르며 서강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신 정양모 신부님 글을 떠올렸습니다. “이 몸이 그대로 부활하는 게 아니라 이승을 살아가면서 이룩된 우리의 사람됨, 인간성, 인격, 인품을 하느님께서 거둬 가신다.” 장지에서 집에 돌아와 노모에게는 어디 갔다 왔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엔 당신 차례라는 생각을 굳이 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도, 나도, 그리고 내 자식, 내 손자도 다 그 차례가 돌아오겠지요. 내 청춘도 날 버렸다고 가버린 봄을 서러워하던 ‘이 산 저 산’은 마지막에 가서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을 이렇게 의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우리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다가 때가 되면 이 개체 ‘나’의 덧없음을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의연히 전체이신 당신 품으로 돌아갈 일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