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의 대화] 70

김재만·교육학 박사·대구교대 교수
입력일 2020-03-12 수정일 2020-03-12 발행일 1977-11-27 제 1082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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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함은 과학 문명 창조에
대상에 대한 지식은 가치 감정이 기준
사람이 지적 동물이라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함은 오랜 문명의 역사가 이를 증거하는 바입니다.

만약 다른 동물들도 지적 동물로 인정 받을 권리가 있다면 어째서 인간만이 문명을 소유하는 오만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지혜를 가지며 지성적일 수 있고 지적 행동이 가능함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으로서 값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을 소유하며 정신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정신은 별로 구분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영혼이 정신보다 한층 오묘한 기원을 갖는다고 억지로 해설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신의 특성을 떠나서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신적 동물이나 영혼적 동물이 다함께 인간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고 규정할 때 그때의 인간은 바로 이 정신·영혼의 특성을 가지고 부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단순히 물질적 인과적인 존재물로 규정할 때도 정신의 자원인 뇌수의 신비적인 작용을 무시해 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아무리 오늘날의 과학 문명으로 인조인간까지를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뇌수에서 분비되어 나오는 정신력은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콤퓨터가 아무리 잘 작동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뇌수의 능력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콤퓨터가 뇌수적 에네르기의 부산물임을 생각할 때 인간의 신비성은 더욱 커갑니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일찍부터 깨달아온 바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과학 문명에 있습니다. 그 과학 문명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항복이 아니라 정신에 의한 물질의 고용인 것입니다. 물질이 정신의 명령에 순종된 형태가 과학을 낳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정신의 설계에 물질이 순종되지 않았다면 새로운 발명은 나타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지식이 어째서 사람의 가치를 증대하느냐 하는 물음은 다른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감상하고 미술을 감상합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감상하거나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술 작품을 감상하다는 것은 매우 난처한 것입니다 가령 그런 경우에 호기심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호기심으로 감상을 보상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흑인들은 흑인 영가에 더없는 향수를 느끼며 한국 사람은 아리랑에 더 큰 향수를 느낍니다.

한 번 멀리 고국을 떠나본 사람은 아리랑의 그 정취를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리랑의 어떤 숨은 의미보다도 그 노래 자체에서 풍겨주는 감격이 향수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리랑뿐이 아닙니다. 그림도 그런 것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비치는「최후의 만찬」과 유럽 사람에게 비치는「최후의 만찬」의 값은 다릅니다.

이러한 원리는 사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라고 합니다. 귀한 집 아이만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귀한 집 아이가 그 어버이에게 귀한 것만큼 천한 집 아이도 그 어버이에겐 소중한 것입니다. 아이가 소중한 것은 집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값진 진주라도 돼지에겐 무가치하며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돌맹이라도 그것을 구하는 자에겐 가치 있는 것입니다.

김재만·교육학 박사·대구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