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의 대화] 69

김재만·교육학 박사·대구교대 교수
입력일 2020-03-12 수정일 2020-03-12 발행일 1977-11-20 제 1081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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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사랑이 따르지 않으면 궤변
사랑에 지식이 따르지 않으면 우둔
옛날에 어진 임금님은 백성들의 동정을 곧잘 살펴서 백성들의 슬픔을 알고 기쁨을 알았습니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학문을 권장하였습니다.

집현전을 만들어 학자들이 모여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밤이 이슥하면 임금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집현전에 나가 집현전의 학사들이 어떤 모양으로 공부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한 번은 밤늦게 집현전에 들렸던 임금님은 곤히 잠들어 있는 학자를 보았습니다. 입었던 자기의 웃옷을 벗어 잠든 그 선비를 덮어주고 발걸음을 죽여 돌아갔던 것입니다. 임금님은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고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선비를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며 백성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지만 나라 사랑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국적 민족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입으로만 애국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내 손으로 사막에 물을 대고 곡식을 심고 꽃을 가꾼 것입니다.

한 포기 풀도 이스라엘 땅에는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 자라난 것이 오늘의 이스라엘이 아니겠습니까? 한 줌의 흙에도 애국은 있고 한 포기 풀에도 애국이 있습니다.

애국이 어찌 정치인들의 독점물일 수 있으며 웅변가의 전유물일 수 있습니까? 묵묵히 땅을 파는 농부야말로 얼마나 그 땅을 사랑하며 또 태양볕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광부들이야말로 얼마나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까? 애국심은 결코 구호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애국심은 애국하는 행위인 것이며 이 땅을 이 나라 백성을 이 땅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애국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며 나라에서 주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훌륭한 힘입니다. 줄 수 있기 위하여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우는 것이 배고픔에 의해서만 우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플 때 젖을 주는 것은 사랑이지만 배가 아픈데 젖을 주는 것은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지 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기만 하면 사랑이 된다고 하는 행위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도 부부의 사랑도 다 지성을 근거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원리는 어떤 종류의 사랑에도 다 합당하는 것입니다.

의사의 환자에 대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이 지성으로써 그 대원칙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만을 가지고 다 처리되는 것이 의술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냉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술을 인술(仁術)이라 하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는 것은 분명히 힘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알고 알기 위하여 사랑합니다. 지성은 분명히 남을 사랑할 자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에 사랑이 따르지 않으면 궤변이요 사랑에 지식이 따르지 않으면 우둔인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우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하여 연구할 수도 있고 알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결국 아는 것은 힘임에 틀림없고 힘의 원천으로서 지성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지식은 사랑의 가치를 증가시켜 주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의 행위에도 보다 높은 지식이 부가됨으로써 그 사랑의 값을 한층 높게 해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물들에게도 사랑의 행위 같은 것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질적으로 저급한 이유는 거기에 지성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동물의 그 사랑 행위는 충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충동을 이용하여 동물을 사육하고 그 동물들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 봉사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의 사랑의 행위는 동물의 그것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충동이 그 행동의 밑바탕에 있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미개한 상태가 아닌 이상 그 충동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형시키거나 또는 그것을 조정하거나 또는 합리화시키는 것인데 그 목적은 결국 인간의 우월성에로 지향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조차도 사기극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정말 너무 인간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계속)

김재만·교육학 박사·대구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