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비워야 느끼고 보인다 / 정영애

정영애(엘리사벳) 동화작가
입력일 2020-03-10 수정일 2020-03-10 발행일 2020-03-15 제 3186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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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요즘 하루에 묵주기도를 4 꿰미 바치고 있어. 아침 기도와 9일 기도, 저녁 기도까지 합하면 약 두 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셈이야. 겉보기엔 꽤 괜찮은 신앙인이지.

하지만 절대 아니야. 나는 기도 중에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다 해. 생각은 날개도 없이 여기저기 날아다녀.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기도 끝나고 할 일까지 계획한다니까. 그러다 화들짝 놀라 마음을 다잡곤 해. 이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의 어떤 구절은 잘도 건너뛰어. 그러면 ‘죄송합니다, 주님.’ 머리를 숙이고 다시 시작해.

이런 날은 정말 비통해. 아, 역시 난 믿음이 약해. 입으로만 기도하고 있어. 구제받지 못할 죄인이야. 한동안 자책하지만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어.

얼마 전, 무심코 엄마 사진을 봤어. 엄마가 하늘길로 떠난 뒤 동생과 엄마 방을 정리하며 투덜댔어. 우리 엄만 욕심이 많다니까, 쓰지도 않을 물건을, 입지도 않을 옷을, 덮지도 않을 이불을, 왜 이렇게 많이 쌓아놓은 거야. 이삼일을 울면서 엄마 방을 정리한 기억이 떠올랐어.

근데 엄마, 내가 멸치 한 상자를 사 왔는데 보관할 곳이 없는 거야. 이미 잡다한 것들로 김치 냉장고와 냉장고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야. 멸치를 넣으려면 비우는 수밖에 없잖아. 냉장고 청소를 시작으로 싱크대, 옷장, 서재까지…. 엄마 딸 아니랄까 봐. 낡고 오래되고 필요 없는 물건이 참 많았어. 모두 욕심이 나서 산 물건이었어. 물건을 치우니까 빈 공간이 생기는 거야. 그곳에 멸치를 넣으며 불현듯 깨달았어.

내 마음도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기도 중에 주님과 일치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가 드리는 청원 기도가 모조리 내 욕심이었어. 건강, 행복, 재물, 평화…. 그저 원하기만 했어.

레지오도 그래. 성모님의 군단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죽으면 레지오 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 수많은 레지오 깃발이 양쪽에 서 있고 그 가운데로 내 관이 주님께 나아가는 엄숙한 광경이라니…. 정말 가당찮은 욕심이지? 그리고 ‘저희가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해 주소서’하는 레지오 기도문을 제일 마음에 들어 했어.

내 마음에 욕심의 먼지가 쌓이고 때가 끼어 순명하지 못하고 주님을 빌미로 나를 섬기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마음이 풍성한 기도도 드리지 못했고, 어중간한 지식으로 성서를 이해했어.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셔. 때때로 주님의 자비를 느끼거든. 그래서 주님이 지금 이 순간이라도 “엘리사벳아, 가자.” 하시면 “예. 주님!” 하며 툴툴 털고 주님을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그러려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는 생각에 헛된 욕심과 자존심까지 비우려고 노력 중이야.

엄마, 성경 말씀처럼 나는 지금까지 지혜와 지식, 우둔과 우매를 깨치려고 내 마음을 쏟았어. 늦은 나이에 이 모든 것이 바람을 붙잡는 일임을 깨달았으니 어쩌면 좋아. 그래도 엄마, 주님은 자비하시니 나를 용서해 주시겠지!

나무들도 힘들게 만든 아름다운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가을에 미련 없이 내뿜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어. 나는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엄마, 자애로운 성모님과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오며 영원한 천상행복을 누리길 바라. 그리고 아주 많이 사랑해. 안녕.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영애(엘리사벳)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