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의 대화] 67

김재만·교육학 박사·대구교대 교수
입력일 2020-03-09 수정일 2020-03-09 발행일 1977-11-06 제 1079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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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선의 벗인 동시 악의 벗
덕이 되려면 윤리학적 보호 필요
사랑은 일치해야 하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주는 것이며 주고받는 것이란 사실에 대해서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사랑을 하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하며 사랑을 받기 위하여는 반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 하나 사랑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건으로서 지성(知性)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치하고 하나가 되는 데도 또 주고받는 데 있어서도 이 지성이 없으면 사랑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성(知性)과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사랑의 이야기를 마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지적 행위와 사랑의 행위가 밀접히 관계해 있고 그러므로써 지성 없이는 사랑 없다는 명제를 설정하고 있거니와 이 명제가 진리이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성적 행위는 무식한 행위에 비해서 더 큰 행복감、더 큰 만족감、더 큰 봉사、더 많은 은혜를 베풀며、더 오랫동안 그런 것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은 이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성이란 것이 사랑의 도구가 아니라 미움의 도구가 됨으로써 인간을 유익하게 하기는커녕 멸망으로 이끄는 현상마저 보아온 우리들이지만 그런 지성을 가지고 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지성은 진정한 의미의 지성일 수 없습니다. 사물의 올바른 이치를 알아야 하며 올바르게 쓸 줄 알아야 하며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되지 않는 지식이라야지 죄 되는 지식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지식은 잘못 쓰면 죄를 가중시키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한갓 노파심이 아니라 과거의 많은 역사적 사실에서나 또는 현재의 많은 문명된 여러 가지 사건들에서 얼마든지 그 예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터놓고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나 또는 현실의 세상사가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소위 지식이란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큼직한 죄는 다 무식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유식자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도둑도 많고 사기한도 많고 살인자도 배신자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서도 더 큰 죄를 지은 자는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니 이게 웬일일까요?

어린이들의 죄보다는 어른의 죄가 더 무거운 것과 같이 무식자의 죄질보다는 유식자의 죄질이 훨씬 악질적이라고 해서 지나친 말일까요?

그러면 지식은 죄의 도구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지식은 선(善)과 더불어 벗인 동시에 악(惡)과 더불어도 친한 사이이며 그래서 선에 대하여 항상 동정하는 벗이지만 동시에 악에 대해서도 관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덕(德)이 되기 위해서는 윤리학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지성과 사랑을 결부시키고자 하는 데는 죄의 도구로서나 또 미움의 도구가 아닌 진정한 인간적 의미의 사랑과 덕의 길잡이로서 지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속)

김재만·교육학 박사·대구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