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한 번도 봄을 본 적이 없다 / 정지윤

정지윤(베로니카) 시인
입력일 2020-03-03 수정일 2020-03-03 발행일 2020-03-08 제 3185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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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엔 많은 존재와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식하고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다. 경쟁과 속도에 밀려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갖기 힘들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멈춰 서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못 보고 살아간다. 나 역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10여년 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몇 달째 감기를 달고 살았다. 각박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늘이나 바람, 꽃, 별 같은 단어들은 내 일상에서 지워졌다. 그 자리에 목표, 성과, 승진, 경쟁 같은 단어들이 자리를 잡고 무성한 가시덤불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다. 내 평가점수가 올라갈수록 체력은 점점 떨어졌지만, 앞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야만 했다.

숨 가쁘게 하루를 보내고 지쳐 돌아오던 밤,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을까. 어느 쪽도 소홀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오랫동안 일 중독으로 살아온 탓인지 직장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온 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20년 다닌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었을 때 마치 시속 100㎞로 달리다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잠시 시간이 멈춰 섰다. 시곗바늘에 매달려 살았던 시간이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당혹한 느낌이 들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세상의 시계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이 두렵고도 낯설었지만, 경쟁과 속도에 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하늘이, 꽃들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아이와 함께 걷는 길, 바람은 향기로웠고 세상 만물이 다 말을 걸어왔다. 늘 가까이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함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지금의 방향에서 1도만 바꾸어도 몇 년 후의 삶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왔던 시간은 힘들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얻은 많은 경험들이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고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실감하게 되었다.

봄꽃들은 하루아침에 피는 것이 아니다. 목련은 짧은 한순간을 피워내기 위해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지난해 여름부터 꽃망울을 만들어 지루한 장마와 불볕더위를 지나, 매서운 바람과 차디찬 눈을 맞으며 꽃망울을 지켜내야 마침내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있다. 기쁨도 잠시 한순간 꽃은 떨어진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영원하지 않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힘들어하지도,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지 말자. 지금, 여기에 존재의 꽃은 핀다.

요즘은 뉴스가 전해주는 꽃소식으로 봄을 알게 된다. 휴대전화로 봄을 터치한다. 비가와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날씨를 검색한다. 화면으로 전해주는 초록을 느끼고, 요리 채널로 봄나물을 먹는다. 디지털 시대에 길들여진 우리 삶은 가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봄 햇살은 화면 밖에 있다. 문을 열고 나와야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만날 수 있다. 실감이 필요하다. 봄이 우리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곁에 따스한 사랑을 전해줄 이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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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윤(베로니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