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9)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
입력일 2020-02-25 수정일 2020-02-25 발행일 2020-03-01 제 3184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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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는 내가 죄의식에 빠져
당신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절대 원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개방하고 나눠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

여행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둘째 녀석이 벌써부터 준비물을 챙기고 몇 번씩 확인한다. 워낙 꼼꼼하고 준비성 있는 녀석이라 평소 제 할 일을 야무지게 잘한다. 다만 너무 꼼꼼해서 때로 쓸데없는 걱정까지 많이 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게 다 아빠를 닮은 탓이다.

나는 상당히 계획적이며 성실한 사람이다. 타고난 성격 탓도 있지만, 고교 시절 치열한 입시경쟁을 겪으며 체득한 일종의 생존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힘든 공부를 벗어나는 방법은 결국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때 이후 나에게 ‘뭐든 잘해야 하고’, ‘미리미리 계획해서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게 항상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사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의 여유와 평화를 갖기 힘들 때가 많았다. 게다가 열심히 했는데도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적지 않은 좌절감과 막막함이 올라왔다.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있었다. 하느님은 마치 엄격한 선생님 같고, 나는 인생이라는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 같았다. 나에게 하느님은 팔짱을 끼고서 내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내려다보시는 분이었다. 나는 착하고 성실하게 기도생활 하면서 기뻐해야 하는 정답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내 삶이나 신앙생활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서 내가 잘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죄의식이 싹트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나를 과연 하느님께서 사랑해주실까 하는….

그러다가 어느 날 관상(觀想)기도를 하게 되었다. 제자들과 길을 가시던 예수님이 잠시 쉬어가자고 하셨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 위에 신문지를 깔고 다들 앉았다. 왠지 죄를 지은 것 같은 나는 감히 예수님 곁에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실까 봐 먼발치 구석에서 엉덩이 한쪽만 신문지에 겨우 걸치고 앉았다.

그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부르셨다. ‘준아, 가까이 와라. 괜찮다.’ 갑작스런 부르심에 깜짝 놀라 눈물이 났다. 그분께서 내 이름을 아신다는 것도 신기했고, 내게 뭐라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불러주시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걱정 말라고, 괜찮다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했는지는 그분에게 전혀 상관이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신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단죄는 내가 스스로 나에게 한 것이지, 그분이 하시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 딱딱하게 멍울져 있던 것이 서서히 풀리는 듯했다.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체험이었다. 이후 하느님에 대한 내 시선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열심히 해서, 잘해서, 선해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커졌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체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느낄 수 있게 했다. 아이가 어떤 일을 저지르든 부모는 아이에 대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나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커졌다. 그러다 보니 일상 속에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많이 줄어들고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열심히는 하지만, 꼭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매번 되뇌고 있다.

스스로를 단죄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악한 힘에게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죄의식에 빠져 당신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절대 원하지 않으신다. 아이가 집에 돌아와 하루 있었던 일을 엄마 아빠에게 재잘거리듯, 당신 앞에 모든 것을 개방하고 나누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

평소 둘째 아이에게 괜찮다는 말,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을 자주 해준다. 어쩌면 그 말은 어린 시절 힘들어했던 나 자신에게 지금의 내가 해주는 말이기도 하고, 지금을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예수님이 해주시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있는 그대로 너는 충분하다고….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