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전환의 시점 / 김우정 신부

김우정 신부(제1대리구 병점본당 주임)
입력일 2020-02-11 수정일 2020-02-11 발행일 2020-02-16 제 318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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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교구의 혼인교리를 강의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은 혼인을 앞두고 교육을 받으러 오신 예비부부들께서 서로를 부르는 ‘자기’라는 호칭이었다. 자신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자신으로 칭한다는 것은 언제든 자신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혼인의 본질적인 의미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받아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모습도 그러지 않았는가.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 호칭이 점점 변화한다. 처음에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 자신이라 불렀던 이는 사라지고 점점 타인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부르는 말들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언가 심하게 어긋나게 되면 그 호칭은 이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닌 ‘적’을 부르는 호칭으로까지 전환된다.

이 기묘한 전환의 시점은 무척 흥미롭다. 처음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려는 마음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고 내가 투자한 본전이 돌아오지 않고 밑지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 호칭이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극적으로 전환된다. 하긴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괴롭히는 사람이 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관계는 혼인뿐 아니라 여러 관계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받을 것이 생각나고 본전이 아쉬워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토록 깊이 마음을 주었던 상대에게조차 화를 내기 시작한다. 애정이 깊었던 만큼 증오와 분노도 깊어진다. 시작할 때 가졌던 감사와 헌신의 마음은 사라진다.

혹시 늘 화가 나 있다면, 어디엔가 자신이 낸 화를 풀 상대를 찾지 못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면, 입과 마음에 늘 불화살과 독화살이 장전되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은 것을 잊고 받을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닐까.

받아야 할 빚이 산더미 같은 사람은 결코 좋은 표정을 짓지 못한다.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것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받을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다. 받은 것을 아는 사람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헌신한다. 지금 받을 것이 산더미같아 화가 나 있다면 받은 것도 좀 돌아보자. 언제나 그렇듯 이미 우리가 받은 것은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큰 법이다.

김우정 신부(제1대리구 병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