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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그리스도교와 ‘냉전’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0-02-04 수정일 2020-02-05 발행일 2020-02-09 제 318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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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의 한 종교 연구소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세계 각국의 종교 박해 사례를 조사해서 책으로 출간할 예정인데, 북한의 상황을 꼭 포함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지난해 7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종교 탄압 피해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는 보도가 국내외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 미얀마, 이란 등 17개 나라 종교 탄압 피해자들이 백악관을 찾았는데, 참석자들 가운데는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탈북 청년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고모를 포함한 가족들 모두가 정치범 수용소에 있고, 다른 친지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됐다고 증언했다. 이어서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몇몇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사진을 전달받았다는 사실도 소개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사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종교와 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20세기의 냉전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중대한 종교전쟁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냉전은 ‘신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 빚어진 세계적 차원의 갈등’이라고 규정되는데,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해뿐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 냉전의 작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했던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를 연구하는 학자 역시 미국이 냉전에 차가운 철강(cold steel)을 제공했다면, 가톨릭교회는 그 정신(moral force)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냉전’과 종교 그리고 평화의 상관관계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종교인들에게 아직 결정적인 성찰의 주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위한 북미대화의 과정에서 북한 인권문제, 특히 종교 자유 문제가 넘기 어려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비핵화 협상 자체도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 대중들과 정치인들에게 종교를 억압하는 북한 정권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불량국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이 냉전적 대립의 상황에서, 북미 간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 역시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상대를 악마로 여겼던 오래된 ‘성전’(聖戰)을 끝내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뿐 아니라 우리 종교인들의 회개도 필요한 것이다. 분단과 전쟁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했던 제자들의 ‘선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민족의 화해를 위해 더 간절히 봉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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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석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