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통일정책과 한국교회- (2) 1972~1989년(명목적 평화통일 정책 시기)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0-02-04 수정일 2020-02-05 발행일 2020-02-09 제 3181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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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암흑기에도 교회는 꾸준히 ‘평화통일’ 말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유신헌법도 ‘평화통일’ 말하지만 독재 강화 위한 수단으로 악용
자유 잃고 고통 겪는 시대에도 교회, 한결같이 통일 당위성 설파
분단 종식·화해 위해 목소리

1972년 8월 9일 당시 서울대교구장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한국교회 입장을 담은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72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강력히 규정짓는 시기였다. 1972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1972년 10월 17일 전격적인 헌정 중단과 함께 선포된 ‘유신’(維新)의 결과였다. 분단 후 통일 정책도 197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만큼 통일 정책에 신기원이 세워진 해이기도 하다.

‘통일정책과 한국교회’ 2편에서는 1972년 유신 선포 시기부터 가장 모범적인 통일정책으로 평가 받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발표된 1989년까지 한반도 통일정책 변화 흐름과 그에 따른 교회 목소리를 다룬다.

■ 4공화국 헌법에 ‘평화통일’ 원칙 도입됐지만 선언적 의미

1972년 유신이 선포되고 그해 12월 27일 새로운 헌법이 시행되면서 대한민국은 제4공화국을 맞이했다. 세칭 ‘유신헌법’에는 ‘평화통일’ 원칙과 정신이 전문을 비롯해 여러 조항에 등장한다. ‘평화 통일’ 정책을 헌법에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평화통일’이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1972년 당시에는 한반도 통일 정책에 있어 일대 전환이었다. 그 이전에는 북한은 무력에 의해 점령하거나 흡수할 대상이었지 대화나 협력의 주체 즉 평화적으로 통일을 논의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신 선포 전 1972년 7월 4일 발표된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 3원칙이 천명되면서 정부 차원에서 처음 등장한 평화통일 원칙이 헌법에 명시됐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보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유신헌법 전문에는 ‘조국의 평화적 통 나오고, 제35조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 제43조 3항에서는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천명된 ‘평화통일’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통일인지에 대해서는 짙은 의문이 제기됐다.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후 단행된 유신헌법으로 남한에서는 박정희 1인 장기집권 체제가 강화됐고 북한에서도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거치며 김일성 1인 독재체제가 더욱 공고화됐다. 남과 북 모두 평화통일에 역행하는 권력장치 강화에 몰두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는 “유신헌법에 도입된 평화통일 원칙은 선언적 의미일 뿐 실제적 의지를 찾기는 힘들다”며 “유신헌법에 의해 더 큰 독재로 흐른 만큼 ‘국내 정치적 구호’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대 국제학부 마상윤(발렌티노) 교수는 좀 다른 견해를 보였다. “1960년대까지는 남한보다 북한의 국력이 더 우월했고 1972년은 남북한 국력이 대등하거나 남한이 약간 열세였던 시기인 것을 고려하면 평화통일 원칙 천명은 즉시 실천에 옮기겠다는 뜻이 아니고, 남한이 국력 면에서 북한을 앞질렀을 때를 기다려 평화통일을 추구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1976년 3월 1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3·1절 기념미사’와 관련해 사제들이 구속된 소식을 보도한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 전신) 1976년 3월 28일자 1면 기사.

■ 1976년 명동대성당 ‘3·1절 기념미사’에서 민족통일 요구, 사제들 구속

실제로 4공화국 내내 평화통일 논의는 질식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76년 3월 1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봉헌되는데 이 자리가 평화통일 논의에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 이날 미사와 기도회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 민주화 운동가들이 참석해 ‘민주 구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이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 철폐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를 근본적으로 재검토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의 과업 등을 주장했다.

정부는 ‘3·1절 기념미사’가 봉헌된 장소가 명동대성당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는 데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권 전복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함세웅·신현봉·문정현 신부를 구속하고 김승훈·장덕필·김택암ㆍ안충석 신부를 불구속 입건했다. 개신교 지도자들도 다수 옥고를 치렀다. 한국교회는 1976년 3월 15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 이름으로 ‘3·1절 기도회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내고 “정부와 국민 모두를 위해서 하느님 정의의 빛이 되도록 기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1979년 3월 1일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3·1절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우리 조국이 자유와 평화와 통일을 성취할 때,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 독립이며, 인류 화해의 신기원으로서 세계사적 보람이 될 것”이라고 통일의 당위성을 재차 강조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 헌법 개정에 의한 새 정부 구성 논의로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 정평위는 1980년 1월 16일 ‘헌법 개정을 위한 원리적 건의’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정평위는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에 민족 통일을 위한 강인한 의지를 표방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어 같은 해 5월 8일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단’이 ‘시국 담화’를 내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새 정부 출범과 ‘우리 겨레의 염원인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주창했지만 1981년 비민주적인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만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1월 22일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내놓는데 민주자결, 민주적 절차, 평화적 방법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박천조(그레고리오) 박사는 “박정희 정권의 통일 정책이 선언적인 수준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은 자유 국민투표 실시, 통일헌법에 따른 총선거 실시 등 구체적인 통일 절차를 규정했다는 면에서 진일보했다”고 분석했다.

■ 1988년 서울 올림픽 영향으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나와

전두환 정권을 이은 노태우 정권은 한반도 통일 논의에 있어 가장 성숙한 정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천조 박사는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미국 LA올림픽이 냉전 구도 여파로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끝난 상황에서 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한 1988년 서울 올림픽(9월 17일~10월 2일)이 결과적으로 남북 통일 논의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해석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월 7일 ‘7·7선언’으로 불리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1989년 9월 11일에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내놓았다. 한국 천주교 정평위는 1989년 4월 21일 ‘현 시국을 우려하는 우리의 호소’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과 유엔 연설은 민족의 분단을 종식하고 화해와 일치를 염원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고 내외의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고 ‘7·7선언’을 높게 평가했다. 가톨릭대 마상윤 교수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여야 정치권과 진보, 보수 시민사회 모두가 동의해 나온 통일방안이어서 현재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이 이상의 통일방안이 나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