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통일정책과 한국교회- (1)1945~1972년(무력에 의한 북진통일 정책 시기)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0-01-14 수정일 2020-01-14 발행일 2020-01-19 제 3179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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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로부터 교회 보호” 호교론 팽배
해방의 기쁨 누린 것도 잠시, 남북 분단의 비극 이어져
종교 탄압 겪었던 한국교회
교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북한 적대시하며 정권에 협력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다. 70년 세월은 남북이 본래 ‘하나의 나라였다’는 사실조차 역사의 유물처럼 만들어 가고 있다.

하나였던 나라는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 이것이 통일이다. 가톨릭신문은 1945년 분단 후 현재까지 각 정권에 따라 통일정책이 어떻게 바뀌어 왔고 교회는 시기별로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살펴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지나간 과거의 기록을 다시 들춰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 보자는 취지다.

■ 분단의 실체는 무엇인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감격을 누린 한반도는 동시에 북위 38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남북 분단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학자들마다 워낙 다양하다. 확실한 것은 한국민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외세에 의해 분단이 야기된 후 남과 북의 이질적 정치세력이 분단을 용인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기 전 일본에 선전포고 한 소련군이 북한에 먼저 진주했다.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사태를 막아야겠다는 미국의 제안에 의해 ‘타협책’으로 38선이 설정됐다는 것이 대체적 견해다.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북에서는 소련군이, 남에서는 미군이 담당하기 위해 38선이 설정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공산주의를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악마의 소산’으로 규정한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 전신) 1949년 11월 10일자 2면 기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남북 분단은 임시조치였나

1945년 분단 후 38선 이북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나 지주 층 가운데는 종교탄압과 토지개혁으로 인한 피해가 현실화되자 월남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월남한 이들의 증언 기록들은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잠시 몸을 피하려고 38선을 넘어 월남했을 뿐 영영 분단이 될 줄은 몰랐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해방정국에서 대중들의 인식처럼 남북 분단은 ‘임시적’ 조치였을까. 대중들의 인식과 남북 분단을 배후에서 조종한 강대국들의 의도에는 큰 간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는 “남북 분단이 처음부터 장기적 또는 영구적으로 계획되지는 않았을 수 있다”며 “대중들은 분단을 임시적, 한시적 조치로 인식한 측면이 있지만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1945년에서 1948년으로 시간이 흘러가면서 남북 분단 구도를 점점 굳혀 갔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남북 분단과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해방정국(1945~1948년)과 이승만 정권 시기(1948~1960년) 남북 분단과 통일 문제에 대해 충실하게 정권과 보조를 맞췄다. 한국교회 입장은 한 마디로 “공산주의와는 절대로 공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고 “북한은 나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박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북한에 적대적 자세를 보인 것은 북한에서 종교 탄압이 가해졌다는 점, 감리교 장로였던 이승만 정권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한 그리스도교를 우대하는 우호 정책을 펼친 사실에 근거한다. 공산주의로부터 교회를 보호한다는 호교론(護敎論)이 노기남 주교로 대표되는 한국교회를 지배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에 협력해 ‘단독정부’, ‘단독선거’를 지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북 분단에 일정한 책임을 지게 됐다. 강주석 신부는 이와 관련해 “남북 분단 국면에서 한국교회가 정치적 행보를 보였고 남북 분단의 거대한 흐름에 동조하거나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가톨릭신문 전신인 천주교회보 1949년 11월 10일자 2면 기사를 보면 공산주의를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남북 분단을 용인한 한국교회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1950년 2월 23일 ‘대한 천주교 주교 일동’ 이름으로 발표한 성명서 ‘사회 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에게 고함’에서도 “공산주의는 수난기의 여러 민족들이 즐겨 마신 달콤한 독약이었다”는 말로 ‘수화상극’(水火相剋, 물과 불이 서로 용납하지 못함)의 적대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 한국전쟁 거치며 북진통일이 국시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박문수(프란치스코) 박사는 “한반도 분단 이후 통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한국전쟁 기간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휴전선을 남겨 놓고 중단됐고 이승만 정권은 무력을 동원해 북한을 점령하겠다는 ‘북진통일’을 국시로 삼았다. 북진통일 이외의 어떤 통일 논의도 감히 용납하지 않는 엄혹한 시대였다. 한국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은 ‘못 찾은 땅’ 즉 ‘미수복 지구’로 여겨졌다.

한국전쟁 중 교회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 2면에서 “공산주의 사상의 박멸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맹세합시다”라는 주장이나, 천주교회보 1951년 3월 20일자 3면에서 “멸공구국의 십자군이 되자”고 역설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전투 참여를 독려하는 기사도 볼 수 있다.

또한 정전 후 「경향잡지」에 사제들의 한국전쟁 체험기가 연재되면서 교회 내에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과 북진통일 의지를 고취하는 간접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윤형중 신부가 「경향잡지」 1954년 1월호~12월호에, 장금구 신부가 「경향잡지」 1955년 1월호~5월호에 ‘6·25동란 체험담’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멸공의 십자군이 되자’고 역설하며 한국전쟁 참전을 촉구하는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 전신) 1951년 3월 20일자 3면 기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4·19와 5·16 후 통일정책의 방향은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천주교 신자인 장면(요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통일정책에 변화가 찾아 왔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했고 통일 논의에 민간이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장면 정권이 1년 만에 허무하게 막을 내리자 군사정부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내세워 과거로 회귀했다.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박천조(그레고리오) 박사는 이에 대해 “장면 정권 시기 등장한 민간 주도의 통일 논의는 박정희 정권에서 완전히 ‘거세’됐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북한은 흡수의 대상일 뿐 대화나 협력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72년 7월 4일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남과 북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통일의 원칙으로 합의한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접한 교회는 당혹감 속에서 “환영한다”는 찬성 입장과 “민간이 배제된 공동성명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회의적 입장으로 나뉘었다.(서광선,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참조)

1972년 8월 9일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중대한 메시지를 낭독한다. 김 추기경은 ‘현시국에 부치는 메시지’에서 “사실인즉 그 저의는 민족의 양단(兩斷)을 영구적으로 동결하는 것인가?, 남북한 집권자들의 정권연장을 위한 권력정치의 술수인가?”라고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김 추기경의 냉철한 비판은 7·4 남북 공동성명의 숨은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