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침묵이 들려주는 나직한 어떤 이야기 / 조정인

조정인(마리안나),시인
입력일 2020-01-07 수정일 2020-01-07 발행일 2020-01-12 제 317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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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새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나니// 하느님의 말을 알아듣는 날/ 그대는 하느님의 지체 곧 하느님이니.’(영화 ‘위대한 침묵’ 중에서)

찬미 예수님! 이렇게 인사를 건네니, ‘찬미예수’라는 말이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는 은밀한 기표였다는 익투스(ΙΧΘΥΣ)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사회를 살면서 ‘찬미 예수님’이라는 인사를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일은 어떤 일일지, 예수 찬미를 고백하는 나는 과연 세인들과 구분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언젠가. ‘나는 내일의 나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감격할까’하는 생각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린 적 있어요. 실로 이곳의 내가 저곳의 나를 만나는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인생이란 게 지금, 여기에 도착한 새로운 나를 만나러 떠나온 여정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늘 조용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35·36년 저쪽, 인생의 과도기인 삼십 대의 길목에서 암울하기만 했던 나에게 천상의 것으로밖엔 표현할 길이 없는 아름다운 미사를 집전하시던 한 사제입니다. 마치도 내 영혼의 설산을 발견한 것 같던, 그날의 미사에 감전되어 며칠 밤을 서성이던 일이 바로 어제의 일만 같습니다.

누군가가 보고 싶다는 건, 그의 부재가 나에게 깃든다는 것. 심중 어딘가로 그에 대한 상념이 내려앉는 것입니다. 그분을 방문한 어느 해 여름, 공원 물가. 한낮의 일렁이는 물그림자가 이마에 헤적였지요. M시의 한 성당에 부임해온 그분을 처음 뵌 지 27~28년은 족히 흐른 뒤였습니다. 세월이 검고 숱 많던 머리칼을 희고 성글게 만들어 놓았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었지요. 젊은 날의 소요(騷擾)를 다 비우고 담담히 재의 사제가 된 분.

어떤 ‘재의 수요일’을 기억합니다. 이마에 재를 받고 자리에 돌아와 손끝으로 비벼보던 침묵의 무늬들과 침묵의 전언들을. 그날, 침묵의 현상적 기표인 재의 울림은 깊고 깊었습니다. 사제는 재에서 성작(聖爵)을 꺼낸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했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침묵’ 화면엔 이런 자막이 흐르지요.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온다.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막스 피카르트)

그 침묵으로부터, 지금 내 곁에는 벤자민 한 그루가 싱싱한 이파리들을 초록 물고기처럼 풀어놓고 의젓하게 저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봄 산책길에 비참한 몰골로 버려졌던 관상용 나무입니다. 화분의 흙은 먼지가 날릴 만큼 말라 있고 뿌리가 들려 죽어가던 나무였지요. 그때 나에게 사랑할 책무 같은 게 강하게 발동했어요. 집에 데려와 마른 잎을 떼 내고 분갈이를 하면서 살려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어요. 수개월이 흘렀고 지금 이처럼 기름지고 성대한 벤자민을 보게 된 거지요.

세상은 사랑할 이유와 책무로 가득한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겨울의 발치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 컵라면에 물을 붓고, 새벽 공사판엘 나가야 하고, 누군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휘감겨 목숨을 잃는, 부조리와 불평등이 만연해 있는 이곳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 발언권이 없는 여린 생명들을 돌보며 함께 해야 한다고, 새벽 어스름 속 벤자민이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인생은 뜻밖에 아름다운 것이고, 모두가 다 잘 될 것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정인(마리안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