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 정현희 수녀

정현희 수녀,(‘꿈사리공동체’ 시설장)
입력일 2020-01-07 수정일 2020-02-11 발행일 2020-01-12 제 317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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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는 이 말은, 청소년의 아버지 돈 보스코가 살레시오 가족에게 남긴 최고의 영적 유산이며 교육 사명의 혼이다.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님도 우리의 사부(師父) 돈 보스코로부터 내려온 이 카리스마로 남수단의 가장 가난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도 이태석 신부님처럼 가장 가난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온전히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원한 살레시오 수녀다. 올해는 어느덧 내가 첫 서원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첫 서원 이후 20년 동안 제2수련기를 빼고는 학교, 복지관, 청소년 수련원 등에서 가장 가난한 청소년들을 돌보고 교육하면서 영혼이 시들지 않는 꿈같은 시간을 걸었다.

지난 세월 동안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고뇌와 고독으로 성소의 위기도 겪었지만, 그때조차도 나는 울고 웃으며 가난한 아이들 곁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 뒤돌아보면, 그 시간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철저히 하나 됐던 은총의 순간이고 부활 전야였다.

불혹을 훌쩍 뛰어넘은 나이에 “변방으로 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외침을 듣고 북한에서 혈혈단신 목숨을 걸고 남쪽 땅으로 자유를 찾아 날아 온 탈북청소년들의 보금자리 ‘꿈사리공동체’(꿈과 사랑의 나눔자리)에 와서 산 지도 벌써 6년째다.

꿈사리공동체는 만18세 이상의 탈북무연고청소녀들 5~6명과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공동생활가정시설(그룹홈)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내가 살아 왔던 수도생활의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과 철저한 자기 인식, 사명으로의 투신을 요구했다. 첫해에는 내가 상상도 못한 힘겨운 삶을 살아 온 아이들의 가슴 마디마디에 뭉쳐진 옹이와, 진물이 고여 있는 영혼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들 자신도 모르게 도사리고 있는 처절한 불안과 분노, 외로움과 부딪히면서 나는 휘청거렸고 도망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기억하고 기도했다. 나는 살레시오 수녀로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고 함께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수도자로 걸어갈 수 있음을. 그리고 아이들의 영혼이 하늘을 향해 열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자유롭게 날아오르기를.

우리 아이들은 매일 꿈을 꾼다. 북한에 계신 부모님, 가족이 살아 있기를, 하루빨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고향 땅에서 다시 살게 되기를 그리고 이 땅에서 당당하고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꾼다.

새해 우리 아이들의 꿈과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 돼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기쁜 소식이 찾아오기를 희망한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현희 수녀,(‘꿈사리공동체’ 시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