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성 요셉! 당신처럼 말없이…

장재봉 신부rn(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9-12-30 수정일 2019-12-31 발행일 2020-01-05 제 317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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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제1독서(이사 60,1-6) 제2독서(에페 3,2.3.5-6) 복음(마태 2,1-12)

요셉 성인의 일상을 뒤흔든 마리아의 잉태 소식
하느님 뜻 헤아리며 침묵 속에 순명한 성인의 삶
오직 주님 뜻에 기준을 두었기에 가능했던 승리
십자가마저 온 마음으로 사랑하도록 은총 청해야

오늘 복음은 매우 특별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분의 탄생을 미리 예견했던 예지, 그분을 뵙기 위해서 단호히 길을 나섰던 결단력,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낸 동방 박사들의 인간 승리 이야기이니까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와 달리 박사들이 경배를 드린 장소가 ‘집’이라고 기록된 사실이 눈에 띕니다. 어쩌면 하느님 아들의 출생 장소가 짐승의 외양간이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파서 ‘집’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도 같지만, 위로가 되는군요.

하지만 그날 마리아의 순산을 위해서 제일 속을 앓으며 애썼을 요셉 성인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는 게 아쉽습니다. 복음이 일러주지 않는 요셉 성인의 삶을 추억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느닷없는 생각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잘 일깨우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해줄 것만 같은 겁니다. 드러나지 않게, 평생을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던 요셉 성인의 삶이야말로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을 가졌는지, 선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글이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께도 기쁨이시길 청하며 성 요셉의 삶을 묵상합니다.

마리아의 잉태 소식은 요셉의 일상을 완전히 뒤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때에 혹은 어느 순간에 무어라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은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만 집중하여 살았다는 증거라 싶은데요.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일러주는 듯 보입니다.

보이치에흐 게르손의 ‘아기 예수를 안은 성 요셉과 성녀 안나’.

솔직히 약혼녀의 임신 소식을 접했던 요셉의 고민은 깊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전해준 것만으로 요셉의 고뇌가 해결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의 혼돈은 사라졌다가도 반복되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번민은 순간마다 때마다 요동치며 마음을 들쑤시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말입니다. 요셉에게 천사의 발현은 성가정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신호에 불과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때부터 요셉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키우는 과제는 매일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여 더 고단한 일상을 살게 했을 것이니까요.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림이 평생 따랐을 것도 같은데요. 이렇게 말이죠! “요셉이 순해 터져서 멍청해. 속았어 속았어…”라는 소문도 따랐을 법하고 “마리아한테 빠져서 정신이 나갔어…”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제아무리 성령의 뜻을 확신하고 따르는 길일지라도 향기로운 꽃길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진리를 건네줍니다. 오히려 믿음이 굳건해서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탓에 비방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믿음으로 세상의 조롱이 치워지지 않는다는 것, 손해를 막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숱한 속앓이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나 혼자, 제대로 믿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 신비의 것임을 명심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아기 예수님이 구유가 아닌 ‘집’에서 태어나셨다고 기록해 준 마태오 복음사도가 고맙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구유에 누어야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겸손이 아니라 인간의 매정함에서 비롯된 결과였으니까요. 그날 예수님은 얼마든지 깨끗하고 따뜻한 곳에서 태어나실 수가 있었을 테니까요.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순산을 도우려 무진 애를 썼을 것입니다. 여관이나 여염집을 가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그 날에 저지른 인간의 과오는 어떤 보상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뵈오며 단단하고 딱딱한 우리의 인색함을 사죄드리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여깁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아기 예수님을 추운 외양간으로 내몰았는지, 면밀히 살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차선에 미루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을 또 다시 구유에 눕게 하는 매몰찬 행위임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요셉 성인께 예수님은 인생일대의 십자가였습니다.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십자가에 성인은 어깨를 짓누르는 통증을 느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성인은 말이 없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 함구했고 예수님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성인은 이렇게 믿음의 길에서는 어떤 조건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아닐지요, 믿음에는 어떤 조건도 달 수 없으며 요구사항을 내세우지 않는 정확하고 강직한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지요.

그러고 보니 성경이 요셉의 언어를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 더욱 심오하게 다가옵니다. 이야말로 절대적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칭찬이라 싶습니다.

요셉 성인의 승리는 삶의 기준을 오직 하느님의 뜻에 두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로지 진리이신 주님의 손길에 삶을 봉헌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진정으로 흠숭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성인의 삶에서 희망을 봅니다. 우리도 군더더기 생각을 치워내고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것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주님을 뵙고 마음모아 크고 우렁찬 찬미를 올리는 오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십자가마저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꼭 그리하시어 모두, 요셉 성인처럼 주님께 소중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장재봉 신부rn(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