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성가대에서 23번째 성탄을 보내며

정태화(프란치스카 대구대교구 경산 진량본당)
입력일 2019-12-24 수정일 2019-12-24 발행일 2020-01-01 제 3176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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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종교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내가 성당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했다.

종교적인 행동이라고는 절에 다니면서 팥죽 끓여 두고 자식 잘 되라고 비는 엄마를 보는 게 다였던 내가 성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통신교리로 세례를 받고 진량공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당시 진량은 공소였지만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실 수는 있었다. 결혼식 때 주례를 해주신 신부님의 짧지만 선명했던 강론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신앙을 스승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1997년 진량공소가 본당이 되면서 성당의 조직들이 갖추어 질 때였다. 성당에서 이래저래 봉사직을 맡아 자주 늦게 들어오던 남편이 그날도 늦었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성가대가 처음 만들어져 연습을 하고 왔다고 했다. “어휴, 그렇잖아도 성당일로 늘 늦게 들어오면서 성가대까지…, 다른 건 몰라도 노래는 내가 훨 잘하는데 성가대는 내가 해야하는데!”하면서 시작한 성가대 활동이었다.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했던 터라 두 아이를 하나씩 껴안고 정신없이 성탄과 부활연습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조금씩 교리를 깨치게 되었고 하느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성가대를 시작할 때 큰 아이는 7살, 작은 아이는 4살이었는데 지금 그 아이들은 스물아홉, 스물여섯이 되었고 각자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큰 아이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재수생 생활을 했던 그해 사순절에는 뒷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부활성가와 미사곡 연습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고, 작은 아이 너댓살 때 성가연습에 안고 가면 낯가림이 심해 두어 시간 연습 내내 꼼짝도 않고 내 품에 안겨 있으려 해서 어깨랑 팔이 많이 아팠던 기억도 난다. 그 당시는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 지금 떠올리니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다. 생소한 라틴어 미사곡을 주 3~4회 저녁마다 연습해서 부활전야미사에서 부를 때의 진한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2009년 진량본당 새성전 봉헌식 때 ‘사명’을 특송으로 장엄하게 부르며 성전 건립의 기쁨을 함께 나눴던 기억은 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 당시 활동했던 단원들은 거의 다 빠지거나 변동되어 창립멤버는 나 혼자 남아 있다. 통신교리로 세례를 받아 교리에 대해서 무지했지만 20여 년 동안 성가를 부르면서 웬만한 성가는 성가책없이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성가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가슴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큰 은총이다. 성가를 하면 은총을 두 배로 받는다는 사실이 진리인 것 같다.

그동안 대여섯 명의 지휘자가 바뀌면서 22번의 성탄을 준비해서 보냈고 올해 23번째 성탄을 보냈다. 23번째. 또 성탄을 보내며 성가와 함께 한 이십여 년의 시간을 회고한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나란히 성가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언젠가는 성가를 그만 부르고 가만히 앉아 미사만 보는 그날이 올 때까지 성가대 내 자리에서 열심히 성가로 당신을 찬미하리라.

정태화(프란치스카 대구대교구 경산 진량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