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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기도와 바람 / 전영구

전영구(스테파노)시인
입력일 2019-12-24 수정일 2019-12-24 발행일 2020-01-01 제 3176호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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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바람은 끝도 없는 것 같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대책도 없는 바람만 안고 살다 보면 그만큼의 실망도 클 것이다. 더러 쉽게 실현이 되는 바람도 있지만 실현이 불가능한 바람 끝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해 주시옵소서!”로 시작하는 막무가내식 바람은 이것만 이루어 주시면 무얼 하겠다는 이루기 힘든 협상을 낳게 된다. “이것만 이루어주시면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해 보면 절실한 바람은 더 절실한 기도만 양산했을 뿐 거기에 따른 노력이나 실천은 없다는 게 현실이다. 설령 간곡히 바라던 것들이 이뤄지게 되면 곧바로 변심하는 게 우리네 습성이다. 그래도 우리는 늘 답 없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기도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고는 한다. 바람이 짙어 스스로도 감정 제어가 안 될 때나, 살아가다 힘겨움에 부딪히게 되면 습관적으로 누구에게 의지하고는 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매달리게 되는 약한 인간의 나약함. 그래서 더 기도에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하는 기도는 고해 못지않은 낯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몰아의 시간이 질책한다. 느슨함을 벗어나 팽창된 절규가 빚은 오류를 다스리지 않고는 너덜거리는 푸념만 있을 뿐이라고. 순산하듯 내뱉은 거룩한 언어로 허물어진 삶을 개축하기란 갈증에 한 모금 물을 뿌려주는 것에 불과한 허망한 짓이라고. 무지한 시작이 부른 폐업 같은 고통의 산물만이 혀끝에 머물 뿐 진솔한 고해는 실종 된 지 오래라고. 탓 안에 갇혀 살다가 탓이 주는 배려에 풀려난 섣부른 기쁨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보이기 싫어하던 치부를 드러낸 알몸이 되어도 삭힐 줄 아는 성숙이 스스로를 감싸는 능력을 키워 그 떨림이 전해질 때, 그때쯤 낮춰진 몸체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죄 없음을 장담한 후안무치가 절정에 다다를 때, 그저 거적뿐인 그대를 알게 되지만 누구나 하는 짓을 버리고 누구도 못하는 의식에 젖어들면 탐스런 욕망들이 한낱 미물로 보여 지는 참된 자신을 얻게 된다고. 기도가 성찬이 되는 믿음을 깨우기 위해 다시 합장하는 거라고….

그저 남들처럼 살고 남만큼만 하고 살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더해져 욕심이 된다면 그나마 주어진 삶조차 버거울 것이다. 평범함을 가장하고 산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바람을 이루기 위해 더한 절실함으로 기도를 드리는 이기적인 생각을 탓해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다는 위로로 자신을 감싸고야 만다. 내 탓은 적고 남의 탓은 넘치는 속 좁은 사람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신기를 느낄수록 철없는 칭얼거림은 극에 달한다. “주시옵소서”, “꼭 들어 주시옵소서.” 실천은 인색한 자기중심적인 바람만 나열하는 넋두리 같은 기도. 꼭 들어주실 거라는 믿음을 끌어안은 채 오늘도 염치없는 기도를 시작한다.

이제는 나를 위해 하는 기도보다는 가정을 위한 기도로 비중이 기울어지는 변화가 낯설지 않음에도 감사하는 삶에 익숙해졌다. 자아 성찰을 바라는 기도만 늘어가는 삶의 변화를 느끼는 지금, 일반적인 바람만 전해도 가끔 이뤄지는 신기에 마냥 특혜자인 양 즐겁다가도 마치 밀물처럼 다가오는 바람에 다시 마음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저 남들은 어찌 됐든 나만을 위해 이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두 손을 모아 내적 기도를 드린다.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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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구(스테파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