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⑬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일본의 그리스도인들

구정모 신부(예수회 일본관구·조치대 신학교수)
입력일 2019-12-24 수정일 2019-12-24 발행일 2020-01-01 제 317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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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13)
“일본교회, 제2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던 과오 뼈저리게 반성”
주교회의 정의평화협, 천황 교체식 위헌적 행위 대해 기자회견
교세 측면서 영향력은 미약하지만 복음화 사명 살아가려 노력

일본은 천황과 신도를 중심으로 한 다신교 사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일본의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일본 사회의 정신체제에는 천황제를 주축으로 하는 선민의식과 신도가 중심에 흐르고 있다. 지난 12회 기획에 이어서 이러한 일본 사회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소수인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을 조치대 신학교수 구정모 신부의 글을 통해 알아본다.

■ 사회정의를 위한 작은 외침

지난 4월 30일, 일본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이하 정평협)와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 일본침례교연맹의 관계자들이 모여 ‘천황 교체식의 위헌적 행위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사임하고 나루히토(徳仁)가 새 천황으로의 실질적 임무를 시작하는 5월 1일의 전날에 이루어진 기자회견이었다.

이 기자회견장에서 정평협 간사인 미쓰노부 이치로 신부는 일본 천황 교체식에 대한 일본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식 때에 특정 종교 예식이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행사라는 명목으로 국비를 지출한 것은 정교 분리의 입장을 천명하는 일본 헌법에 명백히 위배되는 행위였다. 이번 새 천황의 즉위식에서도 특정 종교의 예식이 혼합되어 있고 이를 국비로 충당하려는 것에 대해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가톨릭교회는 계속해서 정교 분리의 원칙과 신앙의 자유를 지킬 것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바이다.”

미쓰노부 신부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메이지 천황 이래 일본은 국가 신도 체제 하에 전체주의를 자행하여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천황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강요했었다. 이렇게 한 인간을 신격화하고, 또한 인간이 만든 제도를 절대화하려는 시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다. 일본은 과거 이렇게 한 인간과 인간들이 만든 제도를 절대화하는 황국사관 안에서 국가와 종교와 무력을 일체화 시키고 전쟁을 통해 아시아의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불행한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현 일본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정교 분리, 주권 재민, 전쟁 포기의 원칙을 정부가 지킬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지난 12회 기획에서 소개해드린 대로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신앙 여정은 천황제 안에 숨겨있는 인간의 신격화 경향이 초래하는 위험성이라는 긴장 속에서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의 정평협의 메시지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현대를 사는 교회가 이렇게 천황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것은 일본 사회에 복음의 빛을 비춰주는 희망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태도는 역사적으로 그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일본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는 직·간접적으로 천황제나 이로 인해 야기된 전쟁을 성전으로 정당화하려는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므로 현대 일본 가톨릭교회의 입장 표명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 나온 성찰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일본의 다양한 그리스도교 종단이 2015년 8월 5일 히로시마에서 원폭 투하 70주년을 맞아 세계 평화를 위한 행진을 하고 있다. CNS 자료사진

■ 조치대학 야스쿠니 신사 참배 거부 사건

1932년에 있었던 조치대학(上智大学) 야스쿠니 신사 참배 거부 사건은 가톨릭교회가 천황제적 가치관에 완전히 종속되는 실마리를 제공한 사건이다. 조치대학은 1913년에 예수회가 설립한 학교로 100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일본 사회 안에서 명문으로 자리 잡은 대학이다. 조치대학 학생에 의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 거부 사건은 조치대학이 일개의 사립대학으로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던 1932년 5월 5일에 발생했다.

당시 군국주의 노선을 걷던 일본 정부는 국민의 애국심 함양이라는 슬로건 아래 신사 참배를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그날 조치대학의 군사 교관을 하고 있던 기타하라 히토미 대위가 학생 60명을 인솔해서 야스쿠니 신사로 참배하러 가려했다. 그런데 출발 직전에 가톨릭 신자 학생 몇 명이 호프만 학장 신부에게 찾아가서 경위를 설명했고 호프만 학장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참배하러 가지 않아도 좋다고 격려했다. 학장의 말을 들은 학생들은 참배에 불참했고, 이 사건은 결국은 학교가 폐교될 위기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됐다. 대중 언론에서도 조치대학의 태도를 비애국적인 것으로 비난했고 이 비난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났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학교 폐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대해서 얼마나 비애국적인 종교인가 하는 인상을 일반 일본 사람들에게 강하게 심어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들과 일본 주교들은 긴급히 교황청과 연락을 했고, 교황청으로부터 신사 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고 애국적 행위임을 확인 받았다. 이를 근거로 하여 도쿄대교구의 샹봉 대주교는 각지의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톨릭 학생들이 신사에서 예를 행하는 것은 조국에 대한 신자들의 존경의 행위로 인정된다고 통보했다. 이리하여 가톨릭교회는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일본 사회의 볼모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번 매국노들의 종교라고 낙인 찍혀 버린 교회는 이후 일본 사회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야 했고, 결국은 일본이 일으킨 끔찍한 전쟁을 교회의 이름으로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물적 인적 재원을 조달하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충성을 보이려고 눈물 나는 노력을 전쟁 내내 계속 하였던 것이다.

■ 자기반성에 기초한 일본교회 복음화 활동

이 글의 처음에 소개해 드린 정평협의 천왕 즉위식에 대한 메시지는 이러한 역사적 굴곡 속에서 뼈저리게 자기반성을 한 교회에서 나온 목소리라는 면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현재의 일본교회가 이렇게 보다 복음적인 성찰이 가능한 것은,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사회 정의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도 연관된다.

특히 1965년 12월에 공표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은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징표 속에서 세상의 기쁨과 희망, 고뇌와 불안을 함께 나눈다는 연대 의식을 강하게 천명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교회는 1970년에 주교단 산하에 정평협을 설립해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했고, 정의와 관계된 사회의 이슈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와 관련해서는 1973년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 정평협은 김대중 구출을 위해 그 어느 단체보다도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밖에도 재일 교포들의 지문 철폐 운동, 베트남 보트 피플을 위한 운동, 부락민 차별 폐지를 위한 운동 등도 적극적으로 펼쳐 왔고, 현재에 와서는 평화 헌법 수호 운동, 난민과 이민자들을 위한 인권운동 등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일본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교회보다 규모도 적고 또 사회에 대한 영향도 미약하다. 그러나 각 지역 교회의 복음적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숫자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게 주님의 복음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안에서 재해석해 내고 또 그 내용을 살아가려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교회는 주님의 성령의 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는 교회임에 분명하다.

구정모 신부(예수회 일본관구·조치대 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