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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만들자] 미국의 생명운동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9-12-23 수정일 2019-12-24 발행일 2020-01-01 제 317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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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반대’ 프로라이프 운동 50년 가까이 지속
‘로 앤 웨이드’ 판결 이후부터 생명수호 노력 꾸준히 펼쳐
각 주마다 제한 규정 다수 실제 낙태율 감소로 이어져
낙태허용법 폐기될 수 있지만 낙태지지 여성 중 24%가 신자
가치관 변화 이끌기엔 역부족 생명운동 지평 보다 넓혀야

프로라이프(pro-life)로 통칭되는, 합법적 살인으로 불리는 낙태를 반대하는 생명운동은 미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진행돼 왔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 중절을 최초로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로 앤 웨이드’ 판결(1973년) 이후 미국의 생명운동은 이 판결을 뒤집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 왔다. 미국 주교회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한 생명운동의 최전방에 낙태반대 운동을 위치시키고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미국의 생명운동 역사와 의미, 최근의 동향 등을 살펴본다.

■ 낙태 반대, 최우선적 사목 과제

미국 주교단은 지난 11월 가을 총회에 즈음해 발표한 서한에서 ‘낙태의 위협’은 미국 가톨릭교회의 ‘최우선적인 사목 과제’(preeminent priority)라고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생명을 위협하는 낙태는 성소인 가정 안에서 생명 자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수많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우리의 최우선적인 사목 과제다. 동시에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위협하는 다른 중대한 문제들, 즉 인종차별, 환경위기, 빈곤, 사형제도 등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이러한 선언은 낙태반대 운동을 지치지 않고 펼쳐 온 미국 주교회의의 입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전혀 예상 밖의 것은 아니었다. 또한, 특별히 202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대통령 후보를 선택하는 비중 있는 기준 중 하나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 일관성 있는 생명윤리 실천

그런데, 이러한 진술에 대해서 일부 주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미국 주교단의 이 서한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명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우선순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카고대교구장 블레이스 수피치 추기경은 무죄한 태아의 수호는 교회의 ‘명백하고 확고하며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지만 동시에 가난한 이, 노인, 난민과 이주민 등의 생명 또한 똑같이 신성한 것이라고 천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인용문을 삽입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논란은 전 시카고대교구장 조셉 버나딘 추기경이 1983년 뉴욕 포담대학교 연설에서 주창한 ‘일관성 있는 생명윤리’(consistent ethic of life) 개념과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낙태, 사형, 전쟁, 빈곤 등에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공통적으로 개입돼 있기에 이런 폭력에 대항해 생명을 지키려고 할 때, 어느 하나를 반대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찬성할 수는 없으며 마치 솔기 없는 옷(seamless garment)처럼 일관성 있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명분 없는 전쟁이었던 이라크 침공, 멕시코 국경으로 몰려드는 난민들에 대한 폭력적 배제, 그리고 낙태반대 운동은 모두 똑같은 인간생명을 위협하는 문제로서 교회의 관심과 돌봄의 높은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18년 1월 1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생명을 위한 행진’. 미국교회는 ‘로 앤 웨이드’ 판결 이후 생명운동의 최전방에 낙태반대 운동을 위치시키고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CNS 자료사진

■ 생명운동의 결실, 낙태규제 강화와 낮아지는 낙태율

사실상 미국의 생명운동은 종종 정치적 입장과 결부되곤 한다. 양당 체제인 미국에서 공화당은 보수적, 민주당은 진보적 성향을 보인다. 이민자, 세계 평화, 기후 문제 등에 있어서 진보적인 민주당은 생명윤리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와 각을 세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이민자들을 박대하는 공화당의 정책들은 피임과 낙태 등에 있어서 교회의 생명윤리와 궤를 같이 한다.

공화당 소속인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의 낙태반대 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선거 유세 때부터 낙태반대 입법을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강력한 반낙태 정책을 실행했다. 연방대법원의 낙태허용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임신 중절 클리닉 지원 예산을 삭감하고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했다.

이후 2017년, 임기 첫해 미국 전역 19개 주에서 낙태를 규제하는 법률 63건이 통과됐고, 임기 첫 반 년 동안의 낙태규제 규정만 431건에 달했다. 2018년 1분기에 37개 주에서 낙태제한 규정 308개가 통과됐다. 특히 조지아 주와 텍사스 주 등 11개 주에서는 6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태아 심장 박동법’을 채택했거나 현재 논의 중이다. 이 법은 사실상 전면적인 낙태 금지법과 다르지 않다.

지난 9월 발표된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낙태율이 ‘로 앤 웨이드’ 판결로 낙태가 합법화된 후 최저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인 낙태지지 단체인 거트마커 연구소(Guttmacher Institute)는 미국의 낙태 건수가 최근인 2017년 86만2000건으로, 이는 2014년(92만6000건)에 비해 6만여 건, 100만 건이 넘었던 2011년에 비해서는 15만여 건이 줄어든 수치다.

■ ‘로 앤 웨이드’ 폐기 전망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조만간 ‘로 앤 웨이드’ 판결이 뒤집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낙태반대 정책과 함께 연방대법원에 보수적 법관들의 포진은 이러한 전망의 실제적 근거이다. 미국 주교회의를 비롯한 프로라이프 진영은 지난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대했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낙태허용법이 폐기되고, ‘로 앤 웨이드’ 판결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헌법적으로 제한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적지 않은 주들은 낙태를 허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워싱턴주는 ‘로 앤 웨이드’ 판결 3년 전인 1970년 낙태를 합법화했고, ‘로 앤 웨이드’ 판결이 뒤집어진다고 하더라도 낙태를 허용하는 주 법을 유지할 전망이다. 이 같은 주가 적어도 13개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교회의 낙태반대 운동이 50년 가까이 진행돼 왔지만, 사실상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태도에 태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뿌리내렸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낙태에 대한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에 의하면, 1977년 미국 전체 인구의 22%가 무조건적인 낙태 합법화를 지지했다. 2019년에는 25%로 조사됐다. 1970년대 이후 50여 년의 생명운동이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와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조셉 노만 대주교는 올해 주교회의 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낙태를 지지하는 미국여성 전체의 24%가 가톨릭 신자라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라는 종교적 정체성이 낙태지지 여부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나딘 추기경은 이와 관련해, 생명운동의 지평을 좀 더 폭넓게 볼 것을 제안했다. 교회는 낙태를 포함해 인간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응해 동료 시민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호소하고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