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화로 만난 하느님] (25·끝) 유다인의 왕 예수

윤인복 교수(아기 예수의 데레사)rn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입력일 2019-12-10 수정일 2019-12-10 발행일 2019-12-15 제 317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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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인류에 대한 사랑의 표징
풍부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십자가 위 주님 표현
해골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시작된 원죄 의미
나무 그루터기에 올라오는 새 가지는 ‘새 계약’ 뜻해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한 그림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 작품을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경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하면서였다. 많은 화가가 예수의 죽음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고통을 초월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의 모습부터 예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한 그림까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다룬 그림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요한 사도가 배치되곤 한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에서 출생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경~1479)는 작은 화폭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과 밀라노 등을 거쳐 1475년경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안토넬로 작품은 색채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미술 특징에 플랑드르 회화의 특징인 섬세한 묘사가 더해져 있다.

그림 맨 앞 왼쪽에는 “1475년,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렸다”는 화가의 서명을 정확하게 라틴어로 적어 놓았다. 작품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두 죄수, 성모 마리아와 예수께서 가장 사랑했던 사도 요한이 보인다. 성모는 두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있는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넘어 체념한 듯하다. 오른쪽 요한 사도는 무릎을 꿇은 채 십자가 위 예수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십자가 처형’, 1475년, 패널에 유채, 52.5X42.5cm,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

■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인 예수

넓게 펼쳐진 들판과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타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고요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병사들이 죄목으로 ‘유다인의 왕 예수’를 나타내는 라틴어 약자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를 적어 놓았다.

십자가 아래에는 자갈과 모래가 뒤덮여 있으며, 해골과 사람의 뼈가 널려 있다. 해골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 빈번히 그려진다. 이는 인류의 시초인 아담이 골고타 언덕에 묻혀 있다는 중세 사람들의 믿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담의 해골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시작된 원죄를 의미하며,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 피로 깨끗이 씻겨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예수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예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의 손발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인류에게 흐르는 사랑의 표징이다. 마치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던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듯이’(창세 2,6-7)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와’(요한 19,34) 세상 모든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의 표징과도 같은 예수의 피와 물을 내어 주신다. 십자가의 수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서막인 셈이다.

예수께서 매달린 십자가 밑 부분의 뒤편에 밑동이가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도 새 가지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됨을 의미한다.

■ 십자가에서 회개한 죄수

중앙에 숨을 거둔 예수의 양옆에 있는 두 명의 죄수는 온몸이 뒤틀린 상태로 나무 기둥에 가죽 끈으로 묶여 있다. 예수와 두 죄수의 모습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많이 연구된 인체 해부학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 양옆에 있는 두 죄수 중에 누가 ‘선한 죄수’인지 추측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발버둥 치는 듯한 두 죄수의 모습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예수의 균형 잡힌 평온한 몸의 형태와 상당히 대조를 보인다.

죽음의 면전에서 한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고 말했다. 땅에서 들어 올려져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루카 23,43)이라고 하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회개한 죄수를 자신에게 이끌어 그를 아버지께 인도할 것이다.

예수의 머리는 ‘선한 죄수’를 향하고 있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예수를 모독했던 오른쪽 죄수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림 맨 앞에는 빛을 싫어하는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가 있다. 이 죄수는 올빼미처럼 진정한 믿음의 빛을 외면하며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화가는 이들의 회개 여부에 따라 몸의 뒤틀림 정도를 묘사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 1480~1485년, 캔버스에 유채, 275×142㎝,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십자가를 따르는 성인

해부학은 의사들에게 신체 내부 구조에 대한 지식을 전달했지만, 예술가들에게는 신체에 대한 구조를 바탕으로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에게 해부학은 시각적 기법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화가는 십자가 위 예수와 두 명의 죄수를 통해 인체 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세바스티아노 성인이 자주 그려진 이유도 성인이 나체의 몸에 화살을 맞으며 순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1년경~1506)는 성인의 자태를 통해 당시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고대 헬레니즘의 아름답고 완전한 신체를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 성인은 신체의 S자 윤곽선과 건장한 육체미를 드러내고 있다. 또 온몸에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지만 시선은 하늘로 향하고 있어,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의 두려움에 괴로워하기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내하는 표정이다.

※그동안 기고해 주신 윤인복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윤인복 교수(아기 예수의 데레사)rn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