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13) 가족, 그 큰 사랑의 힘 (상)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9-12-03 수정일 2019-12-03 발행일 2019-12-08 제 3173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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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제관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보좌 신부님이 내게 ‘오늘 환자 방문 후, 가능하면 그 분께 세례까지 주고 싶다’며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습니다.

“아무런 교리 준비도 없이 세례를 주는 거야?”

“아, 그 분이 누구냐면, 초등부 주일학교 선생님의 할머니예요. 그런데 많이 편찮으신가 봐요. 연세도 90세가 훨씬 넘으신 걸로 알고 있고요. 할머니께선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병원에 계시나봐요. 이제 의식도 점점 없으시고, 말씀도 거의 못하시나 봐요. 그래서 가족들이 임종 준비를 하는데, 그 선생님은 가족들 모두가 할머니께 대세라도 드리고 싶다고 제게 말하기에, 제가 병문안도 갈 겸, 상황을 보고 세례를 드릴 수 있으면 드리고 오려구요.”

“그래? 잘 생각했네. 그려. 그 할머니의 상황을 잘 보고, 4대 교리를 간단히 설명하고, 할머니께서 신앙을 잘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렴.”

그 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보좌 신부님은 그 할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온 후 상황을 말해 주러 내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이에 나는 또 물었습니다.

“할머니 병문안 잘 다녀왔어? 상태는 어떠셨어?”

“예. 잘 다녀왔고요. 세례 때 너무나 감동적인 일이 있었어요.” “왜? 할머니께서 세례를 받고 기적적으로 일어나셨어?”

“그게 아니라, 저녁에 병원에 갔더니 할머니의 자녀분들과 손녀인 본당 주일학교 교사, 그리고 그 언니 등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알고 보니 가족들 대부분은 천주교 신자인데 할머니만 세례를 받지 않은, 좀 특별한 경우였어요. 암튼 병실에서 저는 할머니께 다가가 손을 꼭 잡은 후, 인사를 드렸더니 할머니께서 눈을 뜨시는 거예요. 의식은 완전히 없는 건 아니더라고요. 말씀도 조금씩 하시는 듯 했어요. 할머니께선 저를 쳐다보더니, 또박또박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잘됐다 싶어,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드리고 세례를 줄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할머니 귀에다 대고 ‘할머니, 제가 세례를 드릴께요. 음, 세례 받기 전이라 천주교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릴테니 고개를 끄덕여 주세요. 그리고 예, 믿습니다‘는 말만 하시면 되요.’라고 말했고요. 이어서 간단하게 4대 교리를 가르쳐 드렸고, 할머니께선 또박, 또박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셨어요. 이어서 병실 탁자에 초를 켜 놓고, 세례 준비를 하는데, 제가 그만 실수 아닌 실수를 했어요.”

“아니, 무슨 실수를?”

순간, 감동의 이야기 속에 무슨 비밀이 있는 듯 한 분위기가 펼쳐졌습니다.

“그게… 음, 제가 영대를 하고 난 뒤,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말했어요. ‘할머니, 이제 세례를 받으면, 이 다음에 하느님 나라에 꼭 가실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께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마구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세례를 안 받겠다고! 가족들도 긴장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가족들 모두는 할머니 곁에 다가와, 위로하고 또 뭐라고 위로해 드리는 거예요. 귓속말로 뭐라 뭐라고 말하다가, 할머니의 몸을 어루만지고. 저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식은땀을 흘렸고. 그렇게 가족들은 20분 정도 뭔가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들을 했고, 그제야 할머니의 마음 준비가 됐고, 다시금 세례를 요청하셨어요. 경직된 저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예식서 내용대로 할머니께 정성을 다해 세례를 주었고, 가족들은 그저 감격의 눈물만 흘렸어요. 그렇게 병문안과 세례식이 끝난 후 나는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왔는데, 어찌나 긴장했던지 등에는 식은땀이 엄청 났더라고요.”

(다음 호에 계속)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