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중) 엄마의 자립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9-12-03 수정일 2019-12-03 발행일 2019-12-08 제 3173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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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내서 집을 나왔지만… 지낼 곳 마땅찮아 늘 불안해요”

“살인자 아빠의 신상을 공개합니다.”

지난해 10월 22일, 이혼한 전처 이모(48)씨를 살해한 김모(50)씨 자녀들이 올린 국민 청원은 온 국가를 떠들썩하게 했다. 김씨 자녀들은 “폭력과 살해 협박을 일삼아 온 아빠를 사형시켜 달라”고 국민청원을 했다.

■ 집에서 쫓겨난 피해자

평소 주먹으로 가정을 다스렸던 김씨는 어린 딸들을 때릴 때마다 “짐승도 때리면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 “엄마도 질릴 때까지 맞았다”는 게 자녀들의 증언이다. 이혼 이후에도 미행 등으로 거처를 알아낸 뒤 공갈·협박·폭행을 일삼았다. 숨진 전처 이씨는 4년간 6번이나 이사하면서 도망 다녔다고 한다.

김씨는 징역 30년을 선고 받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존재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12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허술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미흡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피해자가 이주여성인 경우에는 피해가 더욱 심각하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자연스레 이혼율도 높다. 특히 한국 남성들이 돈을 주고 여성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아 여성이 돈값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고, 간병인이나 성적 파트너 정도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이하 복지회) 나눔홍보 담당 홍희정(아녜스로즈)씨는 “가정폭력 문제는 그동안 가정 혹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돼 왔다”며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립하기 위한 국가의 임시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해 민간단체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따듯한 나눔의 손길로 이들을 폭력의 악순환에서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래픽 정희선

■ 아이 둘을 어디서 재워야할지…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에서 진행한 ‘만다라 마음치료’에 참가한 피해 여성 이유진(가명)씨는 ‘자신의 몸’을 그리라고 하자, 위산이 쏟아지는 위를 표현한 그림을 그렸다. 이씨는 아이 둘을 키울 생각에 잠을 잘 못 자고 위산이 분비되는 것을 느낀다며 말끝을 흐렸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듯 나온 그는 집도 없고 직장도 구해야 한다. 위자료나 아이양육비를 받으면 좀 상황이 나아지겠지만, 가정폭력 피해 여성 대부분은 이씨처럼 남편과의 접촉을 두려워해 돈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복지회가 올해 7월 실시한 ‘서울가톨릭여성복지협의회 창립 30주년 기념 토론회’ 발표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생존과 직결되는 ‘주거지원’이다. 보호시설을 나간 피해여성 149명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피해 여성들이 꼽은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보금자리 마련이었다. 보호시설인 쉼터를 나가면, 당장 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해여성 절반 정도가 집세와 관리비 등 주거비가 가장 부담되는 지출이라고 답변했다. 특히 아이가 있을 경우 양육 부담까지 더해져 취업이 더 어렵다. 여기에 자신을 때린 남편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더해지면 심리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것 같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피해자들은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크지만 사회적 관심 부족으로 제대로 된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또 피해 재발 방지를 위해 보호시설의 이름과 위치 등을 노출하지 못하는 특성상 홍보가 어려워 기업 후원도 받기 힘들다. 따라서 피해 여성과 자녀들은 30평 남짓의 아파트 한 채에서 한 방에 3가정씩, 여러 명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현재 복지회에서는 피해자들이 편안한 곳에서 머물며 자립을 준비할 수 있도록 산하 기관 등을 통해 최대한 주거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복지회 산하 소숙희(안나)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장은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 방향이 ‘보호’에서 정서적·경제적·사회적인 부분의 회복이 골고루 균형을 갖춘 통합적인 ‘자립’으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해 여성들이 보호시설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 제한적이라 다시 폭력 가정으로 복귀할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서 “자신이 살던 폭력의 터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자립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 모성이라는 하느님의 선물

“오늘날 많은 곳에서 여성은 차별의 대상이 되며, 모성이라는 선물도 흔히 가치로 여겨지기보다 단점으로 여겨집니다.”

2014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최종 보고서 ‘복음화의 맥락에서 본 가정에 대한 사목적 도전들’ 8항은 여성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여성들이 희생되는 폭력 현상이 유감스럽게도 가정 안에서도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교회는 가정폭력을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명백한 범죄로 본다. 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 위원장 이성효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가정 폭력 예방 안내서」 추천사에서 “폭력이 자행되는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모두가 가정폭력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다”며 “가정폭력은 부부나 개인 가정의 사생활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굴욕감 때문에 피해 사실을 감추고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한다. 교회 내 전문가들은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교회적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각 본당 차원에서 이들에게 따듯한 시선을 보내고 사회복지기금 등을 활용해 지역사회 내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 등에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서울가톨릭여성복지협의회 우정원(제노베파·미리암 이주여성센터장) 회장은 “피해자 보호를 위한 특성상 이름을 공개할 수 없는 시설에 본당이 지속적으로 후원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기존에 사목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도움의 틀을 깨고 보다 많은 이들이 사회적 약자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성금 계좌 : 우리은행 1005-801-165688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모금 기간 : 2019년 11월 27일(수)~12월 21일(토)

기부금 영수증 문의 : 02-727-2242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