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상) 눈 감아도 보이는 남편의 눈동자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9-11-26 수정일 2019-11-27 발행일 2019-12-01 제 3172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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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먹고살 걱정에 참던 나날들…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혼 후 변한 남편, 술에 취하면 욕을 퍼붓고 때려
폭력 피해 도망쳐나온 후 보호시설에서 안정 찾아

한 해가 저물고 우리 안에 오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기다리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이 시기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을 잊지 않는다. 지난 11월 17일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이웃들이 많다. 특히 폭력으로 고통받지만 말 못하고 숨어 사는 여성들이 너무도 많다. 김민지(가명)씨는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여성과 진행한 심층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인물이다. 김씨의 모습에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이 처한 차가운 현실과 말 못할 고통을 담아내고자 했다.

■ 남편이 180도 달라졌어요

23살 겨울, 남편을 처음 만났다. 3년간 나를 쫓아다닌 그는 훤칠한 키에 훈훈했다. 연애하면서 참 잘해 주던 그는 결혼하면 설거지며 집안일이며 나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다. 시어머니도 우리 둘의 결혼을 바랐다. 좀 이른 나이였지만 이렇게 나를 좋아해 주는 남자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결혼 후 지옥 같은 날들이 시작됐다. 결혼을 하자 그와 시댁 식구들이 180도 달라졌다. 예전의 다정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연애 때 술도 잘 안 마시던 그는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 닭대가리 같은 게!”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퍼부었다. 내 남편이 맞나 싶어 혼란스러웠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그 길로 보따리를 싸 친정으로 달려갔지만 엄마는 이혼을 반대했다. 부부란 원래 다 이해하고 참고 사는 거라며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폭언은 폭행으로 번졌다. 신문지를 단단하게 말아 때리고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냐고 물어 보면 늘 내 탓을 했다. 처음에는 혹여 사과를 하면 괜찮아질까 싶어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다. 하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죽어야 이 지옥 같이 반복되는 상황이 끝날 거 같았다. 죽어서 천국에만 갈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게 더 행복할 것 같았다. 손목을 확 그어버리고 싶었지만 아이들 생각에 하루하루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편이 식탁에 칼을 올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혼을 준비하며 외박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칼을 들이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어린 딸이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로 위협했다. 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는 이혼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20년 넘는 세월을 참고 살았는데…. 이혼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여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남은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살아 보고 싶었다.

■ 잘 곳이 없어 덜컥 잡은 썩은 동아줄

어렵게 이혼한 뒤 속은 후련했지만 현실은 매서웠다. 딸은 친정에 맡겼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찜질방을 전전했다. 가끔 찜질방 갈 돈이 없으면 차 안에서 잤다. 그렇게 갈 곳 없이 떠돌던 중 두 번째 남편을 만났다.

“같이 살자”는 낯선 남자의 말에서 따듯함을 느꼈다. 상처받은 내 마음에 친절한 그의 말이 위로가 됐다. 그러나 옷장 안에 쇠파이프와 칼을 숨겨 두는 남자일 줄은 몰랐다.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그를 따라 어느 해안가 마을로 갔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과격해졌다. 치킨집에서 시비가 붙어 사람을 때리고 화가 나면 화분을 집어 던졌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는 집과 돈을 무기 삼아 나를 조종했다. 가진 것 없이 결혼한 나는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 일을 하고 밭일을 도맡아 했다. 20㎏짜리 거름 수십 개를 어깨에 지고 밭에 뿌렸다. 관절이 물러질 때까지 일을 했지만 그가 내게 쥐어준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방에서 게임을 하며 돈을 탕진했다. 심지어 도박에도 손을 대 빚이 수천만 원까지 불어났다.

교회 앞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평소 교회 가는 걸 못마땅해 하던 그는 교회에 불을 지르고 다 죽여버리겠다며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그리고 며칠 뒤 술 먹고 들어온 그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소리를 질러봤지만 그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딸도 폭력의 현장에 그대로 노출돼 위험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가 뽀뽀를 하라고 하면서 입술을 빨았다고 했다. 이후 그는 딸이 무슨 말만 하면 신경질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꿨다. 그가 곰발바닥 같은 손으로 내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해 갈비뼈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꿈이었다. 꿈이었지만 아찔했다.

이 때부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치밀하게 탈출 계획을 짰다. 예전부터 도망가면 쫓아가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그를 보며 두려워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일단 일해서 번 돈을 몰래 모으기 시작했다.

■ 폭력에서 목숨 걸고 탈출하기

어느 날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딸과 함께 차를 운전해 무작정 달렸다. 최대한 멀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딸은 비밀전학이 가능했다. 해안가 생활에 겨우 적응한 딸을 데리고 다시 이사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딸에게 또 전학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남편은 하루에도 수십 통 전화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줄 테니 제발 돌아오라고 빌었다. 전화를 받을 때면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상담 선생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정말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용서를 비는데 시간이 걸리지요.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사과하는 것은 일단 집에 잡아두려는 거죠.”

그러면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성긴급전화 1366을 알려줬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도망쳐 나와서야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이렇게 많은 걸 알았다. 다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나온 이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안하다며 잘해 주겠다던 남편은 내가 말을 듣지 않자 협박을 시작했다. 찾아서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남편의 화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한동안 나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1366에서 연결해 준 이곳에 온 뒤 두려움이 사라지고 희망이 움트고 있다.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며 편안히 잤다.

집을 나오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당장 아이들과 함께 먹고살 걱정에 쉽사리 집을 뛰쳐나오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였다. 이곳에는 먹을 것도 있고 따뜻한 잠자리도 있다. 더욱 담대하게 살아가고 싶은 힘이 생겼다. 이제는 나도 행복하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모금 계좌: 우리은행 1005-801-165688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