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당신의 나라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입력일 2019-11-19 수정일 2019-11-19 발행일 2019-11-24 제 317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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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제1독서(사무엘하 5,1-3) 제2독서(콜로 1,12-20) 복음(루카 23,35ㄴ-43) 

인간을 진정한 ‘화해’에 이르게 하는 것은 어느 한 편의 계산 없는 ‘내어줌’이고, 반대로 화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어이 이겨야 한다는 ‘강박’과 ‘탐욕’, ‘경쟁심’입니다. 교회력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위해 반복되면서 이루어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여정의 최종 도착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력은 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마무리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들은, 최후까지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 화해를 이룩하시고(복음),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 흘림을 통해 평화를 가져다주신(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선포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함으로써 고난과 횡포에 당당해지고 강해지며, 그렇게 인간 본연의 존엄과 축복을 사는 것, 화해를 통해 구현된 하느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두 명의 도둑 사이의 십자가’(1711년 작품) 이콘.

■ 죄인들과 함께한 왕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루카복음 역시 다른 공관복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이는 이사 53,12의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라는 말씀과 연결되며, 십자가 죽음이 끝까지 죄인들과 함께 하신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극한의 순간에도 악의 유혹을 이겨내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사회 지도자들, 군사들, 심지어 옆에 있는 죄수로부터도 ‘남들은 다 구했으면서 자신은 구하지 못하나! 자신이나 구하라!’(35.37.39절 참조)라는 모욕을 받습니다. “자신이나 구하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자극적인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일관된 방향성 -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절대로 그 권한과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셨던 - 을 단번에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들로부터 심판받으시는 상황을 그냥 그대로 두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권위를 증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 나라의 왕권을 온전히 행사하신 모습은 본문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무죄함을 믿음으로 고백한 죄수가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2절)라고 청하자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비로소 당신의 권위와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첫 인간이라는 영예를 허락하심으로써 십자가상에서 왕으로서의 권한을 장엄히 행사하신 것입니다.

■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왕

누군가의 인내와 내어줌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모습은 제1독서에도 소개됩니다. 그동안 분산되어 존재하던 12지파는 다윗을 통해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전체를 통솔하는 임금으로 등극하는데, 헤브론은 예루살렘이 수도로 세워지기 전, 행정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며 다윗의 정치활동 거점지가 된 곳입니다. 이러한 헤브론의 특성은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공유했던 친밀한 유대가 서려있는 곳이었음을 암시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2사무 5,2)라고 고백하고, 자기들이 ‘다윗의 뼈요 살’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1절]), 이러한 직접적 연대와 유착이야말로 다윗의 왕권이 가지는 정당성의 단초가 되는데 사울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에도 이미 실질적인 리더는 다윗이었고, 이는 모든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를 왕으로 인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사울은 다윗을 살해하려 하지만 다윗은 그 어떤 역모나 쿠데타도 계획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이 축성하신 왕이기에 그의 생명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내와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 백성들을 위한 헌신과 내어줌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이 진정으로 선택하신 왕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식별하게 합니다. 다윗의 왕국은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인내해온 기다림과 백성들 스스로의 자발적 요청으로 이루어진 화해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통치자와 나쁜 통치자의 차이는 ‘분열과 분리’를 조장하는지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는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집단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독재적 권위로 유지시키고 이를 사회 전반에 강압적으로 이식시키기 위해 차별과 거부, 소외를 정당화할 때 계급투쟁과 갈등, 대치는 양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와 분열, 혼란을 앞세워 뒤에서는 교묘히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부정부패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화해하다’는 그리스어 ‘카탈랏소’(조정하다, 조화시키다)에 ‘아포’라는 전치사가 합성된 ‘아포카탈랏소’라는 단어이며, 이는 ‘조정하고 조화시키는 화해’를 넘어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에 있도록 조정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느님께서 좋게 보아주시는 조화와 조정은 쿠데타나 폭동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랑과 권위를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인류가 하느님과 좋은 관계에 있도록 조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교회력의 마지막을 보내는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