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누구의 주제런가 / 박천조

박천조(그레고리오)rn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일 2019-11-19 수정일 2019-11-19 발행일 2019-11-24 제 317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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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18일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날입니다. 강원도 동해항에서 ‘금강호’가 북쪽의 고성항으로 첫 출항을 하였지요. 가곡 ‘그리운 금강산’에서 가사로만 접했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열렸던 것입니다. 4박5일 일정으로 출발했던 배에는 승객 937명과 승무원 419명 등 135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후 관광객을 실은 배들은 금강산의 사계에 맞춰 각각 ‘봉래호’, ‘풍악호’, ‘설봉호’로 이어졌습니다. 2003년 2월 14일에는 해로가 아닌 육로를 통한 시범관광 또한 시작됐습니다.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나뉘는데 북쪽에서는 이곳을 22개의 명승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외금강에는 온정, 만물상, 구룡연, 수정봉 등 11개 구역이, 내금강에는 만천, 만폭, 비로봉 등 8개 구역이, 해금강은 삼일포, 해금강, 총석정 등 3개 구역으로 말입니다. 이중 우리에게 개방됐던 곳은 내금강, 외금강, 삼일포, 해금강 일부 구역이었습니다.

금강산은 개성과 마찬가지로 북쪽의 중요한 군사기지였습니다. 동부 해안선까지 약 40㎞에 걸쳐 있는 각 봉우리들과 절벽 등이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금강산의 뒤쪽이 원산이었기에 북쪽도 한국전쟁 때 이곳을 지키기 위해 치열히 방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쪽으로서도 천혜의 자연환경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어 관광코스로 개발했던 것이죠. 이렇듯 190만 명 이상이 방문했던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 11일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부득이 중단됩니다. 금강산 인근 해안이 군사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이를 실감하게 됐던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관광객의 ‘신변안전’과 ‘재발방지’ 문제가 제기됐고 이러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한 상황입니다. 물론 북쪽은 2009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며 재발방지를 약속했다는 입장입니다만 북쪽 초병에 의한 인명 피해였다는 점에서 정서적 간극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제재와 별개로 남북 간에 금강산 관광 문제가 해소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 과거의 아픔을 토닥이며 극복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점에서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불안하다면 금강산이 아닌 다른 곳의 관광을 통해 신뢰를 형성한 이후 그를 바탕으로 금강산 관광을 재개해 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 점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개성관광’ 코스를 활용해 보는 것도 의미 있어 보입니다.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 몇 해’가 돼 버린 금강산 관광 재개와 한반도의 화해협력을 위해 우리 모두의 창조적인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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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조(그레고리오)rn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