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한 선교사들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9-10-15 수정일 2019-10-15 발행일 2019-10-20 제 316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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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를 주님 품으로… 선교로 세계사에 한 획 긋다

선교는 초기교회 때부터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고 교회의 본질과 활동의 대명사였다. 그런 만큼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선교사들의 역사라고 할 만큼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선교의 발자취를 남겼다. 특별히 지역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방인들에게 헌신적으로 선교 활동을 한 이들을 찾아 소개한다.

클로비스의 침례.

■ 성 레미지오(Remigius, Reims 437?~533?)

‘프랑크 민족의 사도’로 불린다. 성인은 437년 갈리아-로마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 랭스에서 교육을 받고 22세에 랭스의 주교로 선출됐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이교도인 프랑크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것이다.

클로비스는 갈리아 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하던 중 알라마니족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되고, 이때 “아내 클로틸다(Clotilde)가 믿는 하느님이 승리를 가져다준다면 자신도 하느님을 믿겠다”고 서약했다. 마침내 496년 톨비악(Tolbiac)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498/499년 성탄절에 레미지오 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다. 클로비스의 세례는 이후 서방교회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도교화 한 고대 문명과 게르만족의 융합을 가능케 한 사건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서구가 탄생할 기틀을 마련했다.

성 파트리치오.

■ 성 파트리치오(Patricius, 389?~493)

아일랜드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이다. 영어식 이름 패트릭(Patrick)으로 잘 알려져 있다. 389년경 스코틀랜드 던바턴 근처 킬패트릭에서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에 아일랜드인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 갔다. 이후 북아일랜드 앤드림에서 6년 동안 양치기 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열정적인 신앙심을 갖게 됐고 꿈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들은 후 탈출했다.

노예로 살았던 기간은 성인에게 아일랜드에 신앙을 전하고 싶다는 소명으로 발전했다. 이에 갈리아 지방 오세르의 제르마노 주교를 찾아가 사제 양성 교육을 받은 후 사제품을 받았다. 계속해서 아일랜드를 회개시키려는 열망을 지녔던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아일랜드인들을 위해 임명된 팔라디오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주교품을 받고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이후 서쪽과 북쪽 지역 등을 돌며 지역 전교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개종자에게 세례를 줬다. 수도원 형태의 성당을 많이 세웠으며 현지인 사제도 배출했다. 이로써 수도자들도 많아졌고 그와 제자들에 의해 수천 명이 개종했다. 또 여러 곳에 성당을 건축하면서 그가 세운 수도원 형상 성당이 지중해 해안을 따라 널리 퍼졌다.

그는 40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며 항상 순교의 위험 속에서 생활해야 할 만큼 곤경도 많았지만 여러 기적을 보이며 소명에 대한 확신과 겸손, 헌신, 용기를 통해 이교도들에게 하느님을 알렸다.

성 보니파시오.

■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54)

‘독일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성인은 675년경 영국 웨식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너슬링 베네딕도회 윈버트 수도원장에게 수학하며 앵글로-색슨 수도원의 사상과 신학 지식, 교황청, 선교 활동 등의 지식을 익혔다.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는데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된 그는 수많은 시와 최초의 라틴 문법서를 쓰는 등 남다른 웅변력과 가르침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머물기보다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성인은 719년 교황으로부터 라인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으며 빈프리트라는 본명 대신 로마 순교자인 ‘보니파시오’로 이름 지어졌다.

성인은 722년, 당시 가장 이교도적인 지역이었던 헤센으로 가서 가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후 카알 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헤센과 튀빙겐에서 선교했으며 오르드루프에 수도원을 설립하며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신앙을 정화하고 쇄신시켰다.

737년 그레고리오 3세 교황으로부터 독일교회 설립을 위임받았던 성인은 잘츠부르크교구, 레겐스부르크교구, 프라이징교구를 설정하고 740년 최초의 바이에른 교회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당시 혼란을 겪고 있던 프랑크교회 개혁에도 힘썼다. 744년에는 프랑크 왕국 주재 교황 대리가 되어 쇄신을 도모했다. 마인츠의 대주교로도 임명됐으나 여러 저항과 갈등에 대주교직을 내려놓고 다시 선교 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754년 프리시아 선교 여행에서 프리즈란트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됐다.

그는 독일인들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교회를 로마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된 교회로 조직한 공로가 크다. 또 프랑크 성직자들을 개혁시켰으며 선교 활동을 위한 수도원 설립을 통해 많은 주교와 교수들을 배출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