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54)
‘독일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성인은 675년경 영국 웨식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너슬링 베네딕도회 윈버트 수도원장에게 수학하며 앵글로-색슨 수도원의 사상과 신학 지식, 교황청, 선교 활동 등의 지식을 익혔다.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는데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된 그는 수많은 시와 최초의 라틴 문법서를 쓰는 등 남다른 웅변력과 가르침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머물기보다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성인은 719년 교황으로부터 라인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으며 빈프리트라는 본명 대신 로마 순교자인 ‘보니파시오’로 이름 지어졌다.
성인은 722년, 당시 가장 이교도적인 지역이었던 헤센으로 가서 가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후 카알 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헤센과 튀빙겐에서 선교했으며 오르드루프에 수도원을 설립하며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신앙을 정화하고 쇄신시켰다.
737년 그레고리오 3세 교황으로부터 독일교회 설립을 위임받았던 성인은 잘츠부르크교구, 레겐스부르크교구, 프라이징교구를 설정하고 740년 최초의 바이에른 교회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당시 혼란을 겪고 있던 프랑크교회 개혁에도 힘썼다. 744년에는 프랑크 왕국 주재 교황 대리가 되어 쇄신을 도모했다. 마인츠의 대주교로도 임명됐으나 여러 저항과 갈등에 대주교직을 내려놓고 다시 선교 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754년 프리시아 선교 여행에서 프리즈란트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됐다.
그는 독일인들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교회를 로마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된 교회로 조직한 공로가 크다. 또 프랑크 성직자들을 개혁시켰으며 선교 활동을 위한 수도원 설립을 통해 많은 주교와 교수들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