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명예기자 단상] 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기에

윤선경(수산나) 명예기자
입력일 2019-09-24 수정일 2019-09-25 발행일 2019-09-29 제 316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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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 명예기자들이 삶과 신앙 속에서 얻은 묵상거리를 독자들과 나눕니다.

“그게 몇 년 전이에요?”

“유치원 다니는 딸을 데리고 그곳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나의 물음에 그녀는 곰곰이 옛일을 떠올리는 눈치다.

성당 맞은편에 미장원이 있다. 여느 미장원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가본 사람은 안다.

“껍질 때문에 사람들이 성가시다 해서요.”

그녀는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지나다 들른 교우가 한쪽 구석에서 박스에 든 대추를 봉지에 나눠 담았다. 모두 주인을 못 찾아 시골에서 올라온 물건들이다.

십 년 전. 대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노인요양센터 신부님이 그녀 가게에서 머리를 자르다 거울을 보고 물었다.

“엘리사벳, 미용 기술 좀 가르쳐 줄래요?”

어르신들 머리를 신부님이 직접 손질한다고 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선뜻 그녀가 대답했다.

주일 아침. 그녀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센터에 가서 미사를 참례하고 오십 명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었다. 잠시 쉬거나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해가 저물었다.

저녁에 짬을 내어 시작한 말씀 공부가 탈출기로 접어든 때는 그녀가 봉사하러 다닌 지 오 년이 되던 해였다. 말씀을 나누는 시간, 그녀의 이야기에 반원들이 관심을 보였다.

“신앙인인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그녀는 생각했다. 혼자 할 수 있지만, 함께 하면 어떨까. 간단한 기술만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토요일 저녁 두 자매가 남편과 함께 미장원에 나타났다. 한 번도 미용 가위를 든 적 없는, 더군다나 남의 머리를 자른 적 없는 사람들이 순수한 이타심으로 미용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실습하려면 가발 쓴 마네킹이 많이 필요했다. “혹시 가발 필요하지 않아요?” 지인이 전화했다. 가게를 정리한다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느덧 빅토리아, 율리아 부부는 능숙하게 가위질을 하는 육 년 차 베테랑 미용사가 되었다. 과연! 여섯 명이 함께 다니니 일이 한결 여유 있고 즐거워졌다.

센터에 귀가 안 들리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다. 그는 늘 비닐봉지에 과자를 담아와 그녀의 딸에게 건네주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찾아가 어깨를 받쳐 든 상태에서 머리를 잘라드렸다. 며칠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단정한 모습으로 보내드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그 일이 가슴에 남았다.

“마치고 돌아올 때 다들 너무 행복해해요.” 엘리사벳이 환하게 웃었다.

아마도 그들을 움직인 건 말씀의 힘이 아닐까 싶다. 탈출기를 공부하며 그들은 이집트를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듯 일상에서 벗어나 새 길로 접어들었으니.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탈렌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는 미용 기술이, 누구에게는 남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일을 글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기에.

윤선경(수산나)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