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지에서 만난 순교자] (4) 청주읍성순교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9-24 수정일 2019-09-24 발행일 2019-09-29 제 316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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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안에서 순례하며 믿음 다지는 도심 속 성지
전통과 현대 공존하는 성안길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도 순교자 숨결 느낄 수 있는 곳
복자 오반지·김사집 등 순교

청주 상권의 중심지 성안길. 청주의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번화가이자 문화의 거리다. 바로 인근에는 청주의 대표적인 재래시장 육거리시장이 있어 전통과 현대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 또한 예로부터 청주읍성, 그리고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이곳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피 흘린 땅이다. 청주읍성순교성지 순례길에서 순교자들을 만났다.

청주 남문 장터 표지석. 청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정기시장 자리로 복자 김사집(프란치스코) 등이 순교한 자리다.

■ 하늘에 닿은 푸른 무지개

왁자지껄한 육거리시장의 먹거리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청주제일교회 정문 오른편에 자리한 청주진영터가 나온다. 바로 이곳 어딘가에 있었을 영장의 집무실인 읍청당 앞에 끌려온 복자 오반지(바오로)는 종이 한 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배교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종이. 그저 서명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마지막 유혹이었다. 그러나 복자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교수형을 받아들였다.

사실 복자는 유혹을 뿌리치는 단호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복자는 장성할 때까지 공부도 일도 하지 않고 자랐다. 혼인 후에는 노름과 술로 재산을 다 탕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흔 살을 넘어 우연히 접한 신앙이 복자를 180도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진천 지장골로 피신해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르침을 지켜나갔다. 그 열심한 신앙생활이 박해자들에게까지 알려져 체포되고 말았다.

청주진영의 영장은 모진 형벌과 함께 그를 배교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회유는 물론이고 “배교한다”는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옥으로 기생을 보내 유혹하기도 했다. 복자와 함께 잡힌 신자들은 이런 유혹에 하나둘 넘어가고 말았지만, 복자는 어떤 유혹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신앙만을 증언했다.

1866년 3월 27일 모든 유혹을 이겨낸 복자가 순교한 직후, 복자의 시신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푸른 무지개가 떴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청주진영에서는 하느님의 종 김준기(안드레아)·전 야고보·최용운(암브로시오)도 순교했다.

■ 사랑으로 전한 복음

시장에서 번화가 쪽으로 이동하다보니 바닥에 ‘청주 남문 밖 장터 순교지’(현 남문사거리 부근) 표지석이 나타났다. 상점가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밟히기를 반복하는 표지석에 여러 순교자들이 당한 고초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이곳은 장날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던 청주의 큰 장이 서던 곳이다. 그 많은 구경꾼 사이에서 박해자들은 신자들을 끌고 다니며 죄인 취급하면서 수치심을 주는 ‘조리돌림’을 했다.

김사집(프란치스코) 복자도 장날이었던 1801년 12월 22일 이 자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또 순교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결코 수치스럽지 않았다. 목격자들은 복자가 “신·망·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증언했다.

김사집 복자는 삼덕 중에서도 애덕이 돋보이는 삶을 살았다. 복자는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희사와 애긍을 해왔는데 이것이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됐다. 또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해 가난한 신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남문사거리를 지나 길을 건너면 청주중앙공원이 나타난다. 이 자리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바로 충청병영에서 순교한 원시보(야고보) 복자도 사랑을 실천하던 순교자다. 원래도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복자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며 덕행을 실천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했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요한 13,35)이라는 말씀을 온몸으로 살던 원시보 복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순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전했다. 복자는 1799년 4월 17일 69세의 나이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진 채로 매를 맞다 죽었다. 순교 후 복자의 시신은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를 목격한 50가족 가량이 입교했다고 한다.

충청병영은 원시보 복자 이후로도 배관겸(프란치스코) 복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자리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자리에 세워진 순교자현양비. 복자 원시보(야고보)·배관겸(프란치스코)가 순교한 곳이다.

청주 북문 밖 장대 순교지.

■ 굳은 믿음으로

충청병영 순교지를 뒤로 하고 청주읍성의 또 다른 순교지 ‘북문 밖 장대 순교지’를 향했다. 청주읍성 북문 길 건너에 자리한 표지석은 옛 청주읍성의 북문 밖에 있던 군대 지휘소인 ‘장대’가 있던 곳으로 장 토마스 복자가 순교한 곳이다. 복자는 누구나 그를 ‘착한 사람’이라 부를 정도로 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에게는 결코 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복자는 배교하면 세간을 돌려주겠다는 관장의 말에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하고, 문초와 형벌에도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다”며 굳은 믿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다시 서운동성당을 향하는 길목, 용두사지 철당간이 자리한 광장에 진입하자 바닥에 ‘청주옥 신앙 증거터’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청주옥은 비록 이곳에서 순교한 이는 없지만, 믿음으로 서로를 권면하면서 하느님만을 바라던 순교자들이 머물던 곳이다.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문득 청주중앙공원에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순교자성월을 맞아 순교자현양비를 찾은 신자들이 부른 성가다. 비록 청주읍성의 순교지와 옥터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순교자들의 믿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순례자들에게 남아있었다. 청주 도심, 순교자들에게도 그랬지만, 우리에게도 삶의 공간에 자리한 청주읍성의 순교지들은 일상 안에서 순례하며 우리의 믿음을 다지는 성지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