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익어가는 벼 이삭을 바라보며 / 최인각 신부

최인각 신부rn(안법고등학교 교장)
입력일 2019-09-24 수정일 2019-09-24 발행일 2019-09-29 제 316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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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현관 앞 화분에 벼가 무르익어갑니다.

모내기철이 좀 지나 “벼를 심으면 학생들에게 정서적으로 좋을 텐데…”라며 혼잣말을 했는데, 직원이 이를 들었는지 이틀 동안 출장 다녀왔더니 현관 앞과 3학년 교실 앞에 커다란 화분 8개에 벼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 왜 풀을 심었어요?” 혹은 “이것은 무슨 꽃을 피워요?”라고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물을 주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인사해주고, 착한 친구가 한번 만져주고 하는 사이에, 약했던 모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포기를 넓혀가며 벼로서 짙푸르게 자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방학 중 며칠 쉬었다가 학교에 와보니, 누군가 돌봐줄 여유가 없었는지 벼가 노랗게 말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벼에게 미안했고, 한편으로 그것을 보면서도 물을 주지 않는 이들이 좀 야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원망하기보다 직접 물을 주고 돌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1주일가량 지났을 때, 물기를 많이 빨아들인 녀석부터 조금씩 기운을 차리면서, 다시금 푸른빛을 내었습니다.

그러더니, 성질 급한 녀석부터 시작하여 이삭을 빼꼼히 드러내며 피워 냈습니다. 그 녀석들보다 성질 급한 나는 벼 이삭이 빨리 나오기를 재촉하며, “힘내서 빨리 나와! 그래야 우리 학생들이 네가 벼임을 알 수 있어” 하며 좀 까칠까칠한 벼 잎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성화를 부릴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녀석들, 그런데 주말이 지내고 온 사이에 이삭이 수북이 피어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이것이 뭔지 아니?” 하고 물었습니다. 내심 ‘교장 신부님, 저희의 정서를 위해 이렇게 벼를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게 무어에요?”라며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가 농촌과 가까이 있어도, 벼농사 짓는 것을 보지 못한 외지에서 온 친구들은 ‘벼’를 알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잘난 듯 목이 뻣뻣하게 피어오르던 벼 이삭은 하늘의 도움과 여러 사람의 손길과 마음에 감사하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밤하늘의 이슬과 곡식을 여물게 하는 가을 햇빛에 벼를 맡기고, 이것을 수확하여 학생들에게 무엇을 만들어 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함께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주던 학생들, 물을 주며 인사를 건네던 선생님들, 사랑의 손길을 건네주며 함께 농사를 지었던 천사들에게 ‘밥을 지어줄까? 떡을 만들어줄까? 아니면 팔아서 대학가는 등록금을 대줄까? 씨를 받아서 내년에 운동장 전체에 큰 농사를 지어볼까?’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쳐 봅니다. 그러다가 떨어지기를 여러 번, 그래도 좋습니다.

아직은 낫을 대어 수확할 때가 되지 않았지만, 왠지 만석꾼이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수능 시험이 한 달 보름 남았는데, 우리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풍성한 수확을 얻기 바라며, 여물어가는 벼 이삭을 바라봅니다. 바라보면 볼수록 기분 좋습니다.

최인각 신부rn(안법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