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물 구경

이연세(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9-08-06 수정일 2019-08-06 발행일 2019-08-11 제 315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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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돼지가 떠내려가요. 그리고 저기 나무 위에 뱀 좀 보세요.” 밤새 장맛비가 세차게 몰아치던 날, 동이 트자마자 아버지는 어린 저의 손을 잡고 수인선 철둑으로 가곤 했습니다. 어제까지의 파란 들판은 온데간데없고 철길 양쪽은 황톳물이 삼켜버렸습니다. 거칠게 흐르는 붉은 물과 함께 돼지, 뱀, 나뭇가지, 가재도구 등이 뒤엉켜 둥둥 떠내려갔지요. 물에 잠긴 논을 허탈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속이 새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철없는 저는 흥미로운 물 구경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군인이 되면서 물, 아니 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결코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일 수 없는 것이 비이고 물이었습니다. 오는 비를 몽땅 맞으며 매복을 설 때도 있었고, 폭우 속 행군으로 사타구니가 벌겋게 쓸리고 발이 퉁퉁 불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빗물에 밥을 말아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조종사가 된 이후에는 비를 맞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계획된 훈련을 변경해야 했고, 갑자기 내린 폭우 때문에 생명을 무릅쓰고 긴급 철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마른장마 끝에 모처럼 세차게 장맛비가 내린 지난달 말, 아내와 함께 탄천으로 물 구경을 갔습니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탄천의 물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상념들이 교차했습니다. 농경지가 황톳물에 잠긴 것을 바라보며 가족의 양식을 걱정했을 아버지, 조국의 산하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어느 산, 어느 벌판에서 야외훈련을 하고 있을 군인들! 피할 곳 없는 훈련장에서 세찬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훈련에 여념이 없겠지요. 그 장병들을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창세기 노아의 방주(方舟)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타락한 인간 세상을 단죄하고자 물 폭탄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당대의 의롭고 흠 없는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곤 40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폭우를 퍼부어 세상의 모든 생물을 땅에서 쓸어버렸습니다. 물은 산들을 모두 덮었습니다.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덩어리들,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숨지고 말았다.’(창세기7,21) 얼마나 참혹했으면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며 그 계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보내셨을까요.

만약 하느님께서 타락한 우리 세상을 다시 한 번 단죄하고자 비를 내리신다면 ‘나는 노아처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지천명의 세월을 살아오며 생각과 말과 행위로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을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의 징표로 인간과 맺은 무지개 계약에 기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날까지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선덕의 탑을 쌓아 나가도록 해야겠지요.

이연세(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교수